김지율의 詩 산책-나의 질투는 나의 힘
김지율의 詩 산책-나의 질투는 나의 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8.30 18:46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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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

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나의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입 속의 검은 잎’의 기형도 시인은 중앙일보 기자였으며, 스물아홉 어느 날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가 떠나고 두 달 뒤에 나온 이 시집은 그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 되었다. 스무 살 무렵 읽은 그의 시는 우울하고 어두웠다. 하지만 과거의 어두운 기억과 비극적인 세계관이 짙게 드러나는 절망적인 시의 밑바닥에서 일상과 세계의 실체를 날카롭게 파악하고 있는 시인의 현실인식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에는 시인의 내면이 좀 더 투명하게 드러난다. 다 읽은 신문 여섯 개를 쓰레기통에 넣고 좁은 창가에서 그는 쓴다.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차라리 나는 내가 철저히 파멸하고 망가져버리는 상태까지 가고 싶었다. 도대체 무엇이 더 남아 있단 말인가?’, ‘죽은 듯이 살아 있는 이유’와 같은 산문의 많은 구절은 어두운 그의 시의 바닥에 닿아 있다.

청춘과 불안의 이십 대는 허무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기형도는 언론인으로서 치열하게 바쁜 일상을 보냈지만, 불면의 밤 시인 곁에는 언제나 현실의 지독한 절망과 권태뿐이었다. 저녁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둔 그런 날들을 돌이켜 보면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다는 고백. 그 고백의 현실은 누구에게나 쉽게 용납되지 않는다. 결핍과 불가능 속의 많은 열등감은 나를 질투와 부러움에 사무친 나날 속에 서성거리게 했다. 그것은 힘없는 주체들이 현실의 삶과 희망을 살아 내기 위한 필연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노라’라는 저 선언적인 말이 아프게 와 닿는 것은 그의 언어가 우울하고 허무하지만 따뜻한 시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시와 현실은 같은 것이다.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둡고 고통스런 현실의 그로테스크적 리얼리즘이 기형도 시의 한 축일 것이다. 그는 그 현실에서 한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바닥끝까지 내려갔다.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을 펼치지 못하고 혼자 죽었다. 시집 해설을 쓴 비평가 김현은 ‘좋은 시인은 그의 개인적 내적 상처를 반성·분석하여 그것의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이 맞다면 기형도 시인은 자신의 삶과 시에 지극히 치열했던 염결적 시인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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