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서울용산기지 시민의 품으로
진주성-서울용산기지 시민의 품으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9.06 18:04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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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서울용산기지 시민의 품으로


110여년간 외국군이 머문 용산기지가 2018년까지 이전하고 용산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서울 중심지역이 군인(미군)기지로 활용되면서 주변 지역의 발전과 강남북을 잇는 교통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봉우리가 굽이굽이 서려서 형상이 푸른 이무기 같다” 고려시대 학자 이인로(1152-1220)가 용산의 모습을 묘사한 글이다. 집현전 학자들이 공부하는 독서당으로 시간이 흐르고 일대 주택가가 형성되면서 현재 산으로서의 풍경은 사라진 상태다. 용산은 한강을 끼고 있어 경치가 뛰어나고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조선시대 초 조세(租稅)로 거둬들인 곡식을 창고에 보관했던 곳이 원효로3가이다.

용산에 처음 외국 군대가 주둔한 것은 고려때(13세기말) 중국에 원나라를 세운 몽골황제 쿠빌라이 칸은 고려를 침략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병참기지를 용산 일대에 두었다. 용산은 원나라가 고려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고려의 물자를 약탈하는 중심지였던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임진왜란 시기에 왜군장수 고니시가 평양 전투에서 패한 뒤 가토가 이끄는 군대와 합류해 오늘날 용산 원효로 청파동 일대에 잠시 주둔하기도 했다. 용산에 본격적으로 외국 군대가 주둔된건 조선 말기(1882)신식 군대와의 차별을 견디지 못한 구식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 삼천여명이 용산에 주둔하게 되었다. 구식 군대가 난을 일으키자 궁밖으로 탈출한 명성왕후는 청나라에 구원 요청을 하자 청나라 황제는 조선을 청나라 속국으로 만들 절호의 기회로 생각 용산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는 임오군란의 배후로 지목 흥선대원군을 강제로 납치해 청나라에 보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승리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고 일본군이 용산일대에 주둔 이듬해 경복궁에서 명성왕후가 시해된 을미사변때 용산에 주둔하던 일본군들이 동원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용산일대에 수만명이 주둔 용산지역 땅300만평을 헐값에 차지 군사기지로 사용 일본군 사령부와 조선총독부 관저, 일본20사단 사령부 2만명의 일본군이 주둔 용산은 일제가 한반도를 무력 통치하고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한반도에 들어온 제7사단이 용산에 머물다 6·25전쟁이 일어나 미군이 들어오면서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 이후 그해 8·15부터 용산에는 주한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올해 말까지 용산 미군기지를 경기도 평택과 오산으로 완전 이전하고 용산 미군기지 자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여러 시설이 들어서게 되어 서울시민의 품으로 돌려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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