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해시계 앙부일구
최초 해시계 앙부일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4.05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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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기식/진주 상봉동동 문화위원
현대사회에서의 시계는 대중화 되어있다. 한때는 손목시계란 개인의 재산수준의 한 표현이며 식민지 시대에는 조끼에 금줄로 매단 휴대용 시계가 갑부를 상징하기도 했다.

휴대용 시계는 조선시대의 세종 때부터 한국인들의 생활 속에 스며들었다. 초침이 돌아가는 서양식 시계는 아니었으나 손바닥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오목형 해시계가 제조됐고 현재 그 유물이 남아있다. 이 휴대용 시계는 세종 때의 오목형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축소한 것이며 상아나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만들었다. 이 휴대용 앙부일구는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12간지의 시간표가 원형의 순서로 적혀있고 13줄의 위선이 그어져 있어 24절기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림자의 길이가 어느 절기를 따라가고 있는가를 통해 그때의 절기를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게다가 소형 나침반까지 함께 넣어 동서남북의 방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안겨준다. 소매 속에 넣고 다니다가 햇빛에 비추어 시간과 절기, 방위 등을 동시에 알 수 있었던 휴대용 시계였던 것이다.

휴대용 해시계와 함께 세종 때 물시계도 개발해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미 신라 성덕왕 17년에 물시계인 누각(漏刻)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돼어있다.

따라서 과학자 장영실(蔣英實)은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물시계를 처음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라 자동시보장치를 갖춘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발명하는데 성공했다고 해야 된다. 이 자격루는 3단의 물통으로 구성된 것으로 잣대가 물을 따라 올라가 일정한 높이에 이르면 미리 장전해둔 쇠알이 굴러 떨어지면서 인형이 나타나 종과 징, 북 등을 울리게 하는 자동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사람이 지키지 않아도 저절로 시각을 알려주었던 이 자격루는 경복궁의 경회루에 설치됐다.

이밖에 세종 때 낮에는 해시계로 밤에는 별시계로 활용됐던 일성정시(日星定時儀) 동지 때 해의 고도를 측정하는 높이 40자의 구리기둥 등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2세기가 지난 1631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鄭斗源) 등이 여러 서양물품들과 함께 자명종을 가져오면서 서양의 기계시계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 되었다.

당시의 자명종은 정해진 시간에 시각을 울리는 오늘날의 괘종(掛鐘)시계를 가리킨 것으로 조선정부는 서양식 자명종을 스스로 개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경종3년(1723년) 서양의 자명종을 그대로 복제한 문진종(文辰鐘)을 제조하는데 성공했고 그 이후 홍대용(洪大容)등 실학자들에 의해 기계시계의 원리와 제조기술이 탐구되면서 한국식 자명종이 잇달아 제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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