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진주성전투를 회상한다
2차 진주성전투를 회상한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4.10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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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래/공연 연출가
진주문화연대 공동대표
임진년 1차 진주성전투 대참패에 대한 보복으로 왜군은 1593년 6월 19일부터 29일까지 11일 간에 걸쳐 9만3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2차 진주성전투를 벌인다. 11일간의 전쟁 중 19일부터 21일까지 3일간은 전투준비 기간이었고 실제 전투는 22일부터 29일까지였다. 당시에 조선군 3800여명을 포함해 6만여명의 민·관·군·승려가 모두 학살돼 임진전쟁에 가장 처절한 패전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세계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참담한 몰살이었다. 계사년 진주성에는 창의사(의병사령관)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희, 진주목사 서예원, 진주판관 성수경, 김해부사 이종인 등이 집결해 있었고 의병장 곽재우, 경상좌병사 고언백은 “지금 일본군의 전세는 성대하고 조선군은 중과부적이라 성을 비우고 외곽에서 전투를 벌이는 게 유리하다”며 수성(守城)에 반대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김천일이 명군에 구원을 수차례 요청했으나 강화교섭을 원하던 명군은 구원의 의지가 없었다. 왜장 소서행장을 만난 명나라 심유경은 진주성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청했지만 ‘풍신수길의 명’으로 거절당했다. 심유경은 조선도원수 김명원에게 진주성을 비워서 왜군을 피할 것을 권고하며 명의 군사는 대기만 시켜놓은 채 진주성을 돕지 않았다. 결국 진주성은 외곽부대의 지원 없이 고립무원의 상태로 전투를 치렀다. 또한 의병 관군 등이 혼합된 부대로 지휘 통솔이 일사불란하지 못해 김천일, 최경희, 서예원 등으로 지휘계통이 나누어져 큰 혼선을 빚었다. 그리하여 2차 진주성 전투의 패인은 지원병이 없었던 고립무원의 진주성과 성 내부의 지휘계통 혼란 등으로 빚어진 전략부재가 함락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왜군은 작전 개시일인 6월 19일 의령에서 진주로 진격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22일 오전부터 3차례나 적군의 침입이 있었고 주간 3전3퇴 야간 4전4퇴의 격전이 벌어졌다. 24일 왜군이 5000여 명의 병력을 추가하여 마현에 진을 치고 또 600여 명의 병력을 보태어 동변에 진을 쳤다. 이날 왜군의 귀갑차가 처음 등장했다.

왕조실록에 나타난 25일의 상황은 왜군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서 성을 내려다보고 조총을 쏘아댔다. 충청병사 황진이 직접 나서 성안에 토성을 만들어 현자포로 응전해 왜군의 성을 격파했다고 한다. 26일 왜군은 목궤를 만들어 생피로 덮어 싸고 이를 각자 머리위에 이고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성을 헐려고 하자 성안에서 큰 돌을 굴려 막았다.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진주목사 서예원이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자 김천일은 사천현감 장윤을 임시목사로 삼아 사태를 진정시켰다. 이 날 동쪽의 한 벽이 무너져 왜군이 이틈을 타 올라왔는데 김준민이 이를 막으려다 전사했다. 27일 왜군이 동·서 양쪽 성문 밖 등 다섯 곳에다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대쪽을 연결해 방책을 만들어 성안을 보면서 조총을 발사해 전사자가 300명이나 생겼다. 왜군은 s성벽을 함락시키기로 하고 성벽에 돌입할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28일 서예원의 담당지역이 적병에 의해 함락됐다. 날이 밝아 오면서 왜군이 이곳을 통해 집중공격을 해 왔으나 황진, 이종인 등이 앞장서 이들을 격퇴시켰다. 그렇지만 당시 성벽아래 잠복한 왜병에 의해 황진이 전사하자 조선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29일 사천현감 장윤으로 하여금 황진을 대신해 수성장으로 삼았으나 그 또한 전사하고 말았다. 오후 들어 성 동쪽이 무너져 왜군이 물밀 듯이 쳐들어 왔고 이를 물리쳤다. 또 다시 왜군이 서·북문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자 창의사 김천일도 당해내지 못하고 촉석루 쪽으로 후퇴하니 왜군이 마침내 성내에 진입했다. 1593년 6월 그믐날(29일) 진주성이 함락된 것이다. 이날 전투에서 이잠, 강희진, 오유 등이 전사했고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고종후, 이종인, 양산숙 등은 모두 남강에 투신자살 했다.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시켜 평지로 만들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성안에 죽은 자가 6만여명이라 했다.

임진전쟁 이후 60갑자로 7번째가 되는 임진년을 맞아 420년 전, 충절의 상징적 역사를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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