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다솔사 김동리문학관 건립 가시화 되나
사천 다솔사 김동리문학관 건립 가시화 되나
  • 김영우 선임기자
  • 승인 2018.10.24 18:23
  •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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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은 김동리 선생 10년 머물며 대부분 작품 집필한 제2의 고향

건립부지 확보 불구 예산 확보 못해 수년째 진전없이 답보상태
올해 김동리다솔문학제 여상규 의원 참석 예산 확보 청신호 커져


▲ 김동리 선생이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한 사천 다솔사.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작가 김동리(1913~1995)를 기리기 위한 ‘제4회 김동리 다솔문학축제’가 지난 13일 사천시 곤명면 다솔사 경내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김동리 다솔문학축제는 김동리 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행사로, 특히 올해 행사는 김동리문학관의 건립을 위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느냐에 관심이 쏠리면서 문단은 물론 지역 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이날 행사에는 국회 법사위원장인 여상규 의원이 국정감사에도 불구하고 참석해 김동리문학관 건립에 대한 의지를 적극 피력함에 따라 문학관 건립을 위한 국비 예산 확보에도 청신호가 켜졌다는 기대섞인 전망이 나오면서 황규홍 김동리 다솔문학협회 회장을 비롯한 지역문인들을 잔뜩 고무시켰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에 건립부지 마련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는 사천 다솔사 김동리문학관 건립이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는 기대 섞인 전망이 나온다. 이에 본지에서는 다솔사 김동리문학관 건립 추진 배경과 앞으로의 전망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김동리와 사천 다솔사
김동리 선생은 1981년 작품 ‘을화’로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오르기까지 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소신 공양을 주제로 한 ‘등신불’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김동리 선생은 사천시와 인연이 깊다. 사천시 곤명면 다솔사는 김동리 선생이 20대 초반부터 광복 전까지 10여 년간 머물면서 대부분의 작품을 쓰고 구상한 ‘제2의 고향’이다. 김동리 선생은 다솔사에 머물며 광명학원이란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 운동을 펼치는 한편 많은 작품들을 구상하거나 또는 집필했다.

김동리 선생은 다솔사가 있는 사천에 20대 초반 약관의 나이에 홀연히 와서 장장 11년 세월의 청춘을 바쳐 일제에 항거하며 대부분의 문제 작품을 쓴 제2의 고향이다. 선생은 1935년 23세에 다솔사를 찾은 후 대표적 작품 대부분을 이곳에서 썼다. 또한 동양철학자이며 사상가인 그의 큰형인 범부 선생 가족과 어머니까지 이곳 다솔사 아래 용산리에 모두 이사해 사셨고, 선생은 곤명 원전리에서 당시 사천 출신으로 진주 일신여고를 나온 함양 백전보통학교 교사였던 김월계와 결혼해 4남매를 낳았다.

▲ 지난 13일 다솔사 경내에서 열린‘제4회 김동리 다솔문학축제’에서 참석자들이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경북 경주가 고향인 김동리 선생에게 사천이 제2의 고향인 셈이다.

김동리 선생은 1937년부터 다솔사 소속으로 곤명면에 위치했던 광명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후학양성에도 힘을 쏟았는데 기미가요와 군가를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매일 일본 순사가 찾아와 감시를 한 끝에 1942년 학원이 강제폐쇄를 당하기도 했다. 이 당시에 일제하 어용문학단체 가입 권고를 거절하고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42년 학원 폐쇄 후 일제 징용 영장이 나왔다는 정보를 듣고 만주 등지로 방랑하다가 하동의 후배 집에서 은거하며 소설 ‘역마’를 구상하게 됐고, 해방 후인 1946년 서울로 이사했다.

▲ 강희근 시인(경상대 명예교수)가 다솔문학축제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다솔사에서 태어난 작품 ‘등신불’
김동리 선생의 대표작인 ‘등신불’은 1958년 발표돼 다솔사와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선생이 다솔사에 있을 때 기록을 해 둔 것이 작품으로 발표 된 것이다. 다솔사와 최범술 주지의 영향으로 선생이 모티브를 잡은 작품인 것이다. 당시 다솔사에는 만해 한용운을 비롯해 주지 최범술, 불교학자 김법린, 불교철학을 연구 교육하는 데 힘쓴 선생의 형 김범부 등이 은거하면서 독립 운동을 했다.

선생은 자전 에세이에서 다솔사에 있던 ‘소신대’를 두고 만해 한용운과 범부, 범술 세분의 소신공양 이야기에 충격을 받아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소설의 등장인물인 주인공 ‘나’는 일본 대정대학 재학 중인 학병으로 되어 있는데 대정대학은 최범술 주지가 다닌 대학이다.

▲ 김동리문학관 건립을 추진하는 황규홍 회장이 다솔문학축제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동리문학관 건립
이처럼 김동리 선생이 사천 다솔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데 착안해 황규홍 김동리다솔문학협회 회장을 비롯한 지역의 문인들이 지난 2015년부터 사천시의 예산지원을 받아 ‘김동리 다솔문학제’를 해마다 열고 있으며, 김동리 다솔문학관을 건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김동리 다솔문학관은 현재 부지가 확보된 상태이며, 다솔사 밑에 건평 420평 기반 3층 건물 계획 등으로 총 1250평을 김성언 다솔사 휴게소 회장이 기증했다.

문제는 수십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건립예산을 확보하는 일이다. 문학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황규홍 회장은 문화체육관광부에 국비를 요청하고 경남도와 사천시에 지방비를 신청하고 기업체의 후원금을 통해 예산을 확보할 계획이다.

▲ 여상규 국회의원이 다솔문학축제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다솔문학제 행사에 지역출신인 여상규 국회의원이 참석한 것은 예산 확보에 매우 고무적인 일로 평가되고 있다. 여상규 의원은 이날 행사에서 인사말을 통해 “잘 아시다시피 사천은 항공우주산업도시이다. 항공우주산업도시가 격을 갖추고 문화가 있는 도시로 발전하려면 김동리 문학관 같은 시설이 필요하다. 그래야 사천의 항공우주도시도 빛이 난다. 사천을 찾아 주시는 분들께서 문학의 냄새가 물신풍기고 격이 있는 도시라는 얘기를 듣고 싶다. 그래서 국감중인데도 사천에 김동리 문학관을 짓는데 도움을 주기위해 내려왔다”고 밝혔다.

국회 법사위원장인 여상규 의원이 국비 예산 확보를 위해 움직이게 되면 김동리 다솔문학관 건립은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대해 황규홍 회장은 “그동안 건립부지까지 희사받아 놓고도 예산확보가 안돼 문학관 건립이 답보 상태여서 답답한 마음 이었는데 여상규 의원이 힘을 보탠다는 약속을 해주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앞으로 문학관 건립이 잘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황 회장은 아울러 송도근 사천시장과 박정열 도의원 등의 협조를 통해 도비와 시비를 확보하는데도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황규홍 회장의 말대로 지역문인들의 숙원이기도 한 김동리 다솔문학관 건립이 급물살을 타게 될지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 김동리 선생의 생전 모습.
■김동리는 누구인가
김동리(1913~1995)는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계남소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계성중학과 서울 경신중학에서 수학했다. 20대 초반인 1935년 사천 다솔사에 정착해 11년동안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을 쓰며 일제 항거했다. 경주가 고향이지만 사천이 제2의 고향인 셈이다.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가 입선하고, 19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화랑의 후예’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산화’가 당선돼 등단했다. 당시 다솔사에 은거하던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 중 한 명인 맏형 김범부의 영향을 크게 받아 성장할 수 있었다.

김동리 선생은 해방기에는 좌익 측에 반대해 민족주의적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창립해 회장에 취임했다. 1953년 서라벌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에 부임했고, 1954년에 41세의 나이로 예술원 회원이 됐다. 인간성 옹호에 바탕을 둔 순수문학을 주장했고, 문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김동리 선생은 1981년 작품 ‘을화’로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오르기까지 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우리나라 소설사에서는 작품자체의 성과를 통해 한국문학의 독자적 미학을 수립하고 토속적인 풍속의 신화 민족정신의 토양이라고 할 수 있는 지방적인 소재를 완벽한 소설미학으로 재구성 해 보이면서 보편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광복이후 한국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목이다. 제자들도 많지만 제일 사랑하는 제자로는 박경리 작가를 들 수 있는데 이것 역시 토지의 배경을 김동리 부인의 가문 이야기에서 생산한 것이다.

김동리 선생이 우리나라 문학사에 끼친 발자취는 첫째는 철저한 우익인 민족주의 문학사상을 널리 알리고, 두 번 째로는 토속종교와 서양종교의 갈등문제를 작품으로 잘 풀어냈고, 세 번째는 6·25 이후에는 공산주의의 이념과 인간관계를 제대로 작품에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나라 문학사 역사상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에 배경이 환경이 전혀 돼있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김동리를 노벨문학상 대상으로 올렸다. 소문에 의하면 랭킹 5위까지 올라갔다는 말도 있다. 그 이후로는 전무하다 학술원상도 받았고, 예술원상도 받았고, 3·1문학상도 받았다. 김영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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