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역사의 흐름
칼럼-역사의 흐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11.08 18:3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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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홍/김동리 다솔문학 협회 회장ㆍ시인ㆍ작가

황규홍/김동리 다솔문학 협회 회장ㆍ시인ㆍ작가-역사의 흐름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통치 이전에 우리스스로의 힘으로 문명화를 시도하였고, 식민통치 명분이었던 조선 문명화를 고종은 궁궐 증축을 넘어서서 도시 전체와 나라의 농민정책을 변신까지 시도한 듯 보인다. 국제적인 감각을 이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고종이 꿈꾼 대한제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외부 세계에서 황제국의 자격을 증명하고자 했었다. 문명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고종의 경운궁 프로젝트를 통해 대한민국의 역량 입증을 시도하였다. 전통 건물과 서양식 건물을 함께 지음으로써 구본 신참의 원칙을 구현한 것을 경북궁을 통해 알 수가 있다. 일제 식민통치 이전에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문명화를 시도하면서 이는 대한제국이 시대상황에 맞게 대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많은 역사의 흐름이 있지만, 러일전쟁(1904)발발로 결국 열리지 못한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이, 고종의 야심작 대한제국 주최 국제행사는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만국공범 체제 속에서 다른 나라들과 동등한 지위에 서려했던 대한제국의 꿈인 이런 국제적인 기념행사를 시도한 것은 의미가 있었지만, 일본의 식민통치 논리에 의하여 조선의 근대화, 문명화를 근대문명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외교전을 통해서 독립국가임을 알리려고 한 고종의 노력을 볼 수가 있다. 이런 노력이 고종의 반격이었음을 우리는 인정하여야 한다.

진실 된 국민들에게 신뢰와 거짓이 없는 고종의 충전된 국민을 향한 마음이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었다. 그동안의 20세기 전쟁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었다. 더 정교해진 새로운 기술이 발명되면서 지금의 국제적인 흐름이 강대국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새로운 기술이 ‘핵’을 보유하게 된 사항에서 전쟁에서는 항상 기술 경쟁을 하는 것이 월남전에서 목격 할 수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파괴력의 봉인이 풀리고 말았다. 월남전에서는 핵을 사용 안 하고 모두 조심을 하도록 하면서 전술의 기술로 통일이 되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전쟁에서 이기려면 훌륭한 군 지도자가 되기 위해 자신감을 고무시켜야 한다. 성공적인 군 지도자는 아군과 적군의 장단점을 모두 알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이 일차적인 전술이다. 굉장히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리이므로 성격이 가차 없어야 한다. 김일성은 1912년 출생하여-1994년 사망, 직위는 북한 주석이고 관련 전쟁은 한국전쟁이다. 김일성은 자신의 사상과 공산주의 이념 아래 한반도를 통일하고자 했으며, 이는 1950년 한국 전쟁 발발의 원인이었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이 때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보다 강력하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 내전에 파병되었던 무장한 북한군 5만 명이 귀국하였고, 이러한 이점을 활용해 승리를 쉽게 얻으려 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북한 공산당에 의해 열 곳 이상을 침공당한 남한이 전쟁터가 됐던 것이다. 불리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지만 북한군은 쑥밭이 된 남한에 가차 없는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38선 한 반도의 정치적 통일을 주된 목표로 여겼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어느 정도 토대가 확립된 셈이었다.

중국은 1949년 마오쩌둥의 통치가 김일성 철학과 닮았다. 마오쩌둥은 20세기 지도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군사 전문과 전략 수행에 대한 마오쩌둥의 사고방식은 매우 영악하고 획기적이었다. 세력의 근거를 최초로 농촌에 둔 공산당 지도자였다. 지금 우리나라의 농촌에 북한의 영농 교류는 여기서 착안을 많이 한다. 마오쩌뚱 1893년 출생하여-1976년 사망 하였다, 직위는 중국 공산당 주석이다, 관련전쟁은 중국내전이다. 김일성은 그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는 성격이 급하고 독재력이 강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인물로 매우 영리하고 약삭빠른 정치가였다. 김정일은 이오시프 스탈린을 좋아했다. 1878년 출생하여 – 1953년 사망 하였고, 직위는 소련 서기장이었다. 관련 전쟁은 2차 세계대전이다. 그는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불리어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에게 역사란 대의를 중심으로 전진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희생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스탈린은 항상 자신의 직감을 신뢰했는데 대부분 맞는 것으로 드러났다. 자신만이 그 비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김정일과 닮은 그는 농촌이 중국을 바꿀 원동력이라며 계몽을 하여 농촌에 파급하였다.

전략에서는 영토 점령이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군사력의 보호와 사용이었다.

영토보다는 인력이 귀중한 것이다. 1937년 게릴라 전략의 수립이다. 비대칭적 게릴라전을 창안 하였다. 여기는 베트남의 호찌민도 모델로 여기면서 더욱 전술을 창안하였다. 농민운동, 전교조 활동, 사회조직 등 그는 이것을 농촌지역의 새로운 사회적 조직과 연결했었다.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새로운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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