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율곡이이의 구도(九度)장원(2)
진주성-율곡이이의 구도(九度)장원(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11.08 18:31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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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율곡이이의 구도(九度)장원(2)


이이(李珥 1536-1594) 조선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다. 아명은 현용(現龍) 이원수와 정경부인 신사임당의 3남이다. 아이때 이름은 ‘현용’에서 뒤에 ‘이(珥)’로 바꾸었다.

이이가 8살때에 지은 ‘화석정’이라는 시는 파주군 율곡리에서 임진강을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숲속 외로운 정자에 가을은 이미 깊어 가는데…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석양 구름 속으로 울음소리 멀어지네’ 1548년 이이는 13세때 진사 초시에 장원급제하여 이후 아홉 번의 장원급제로 퇴계 이황으로부터 구도장원(壯元)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이는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나 6살까지 그곳에서 자라다 이후부터 아버지 고향인 파주로 옮겨와 성장했다. 화석정의 시는 이이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근거로 곧잘 인용되는 시다. 이이의 학문은 날로 깊어가서 15세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더는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성리학까지 깊이 연구하였다.

이이는 이황을 선학으로 모시고 존경 1558년 23살에 이이는 당시 대학자인 58세의 퇴계를 찾아가 만나 그곳에서 2일간 머물면서 이황과 학문에 관하여 문제와 사상을 논하고 시를 짓고 토론하였고 이황은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였다. 비록 견해는 일치시키지 못했지만 그후 이들은 가끔 편지로 질의응답으로 나누곤 하였다. 1571년에 청주목사로 임명 서후향악을 정하고 백성들의 자치생활을 권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해 사직하고 고향 율곡촌에 돌아와 학문에 힘썼다. 1570년에 퇴계가 돌아가셨다. 율곡이 제문을 4행으로 된 68구를 지었다.(판단의 기준을 잃고, 주인을 잃고, 희망을 잃은 세상이었다…하늘이 그만 남겨두지 않아 철인께서 서둘러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42세때 황해도 해주의 석담으로 낙향 은거하면서 글을 배우는 사람을 위하여 ‘격몽요결’을 저술했다. 1580년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성학집요’를 저술 선조임금은 이책은 참으로 필요한 책이라면서 율곡을 칭찬하고 정치에 필요한 책이라고 하셨다. 1582년 이조 형조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국방강화를 위하여 시무육조를 계진하였다.

내용은 ⓵어진이 등용 ⓶군대를 키울 것 ⓷재용(再用)마련 ⓸국경을 견고하게 ⓹군마를 기를 것 ⓺교화(敎化)를 밝힐 것 등이다. 이이가 양병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율곡은 학문으로 유명 할 뿐 아니라 경세가로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예언한 것은 유명하다.

이이는 49세에 병이난지 이틀만에 운명하였기에 자운서원에 가족묘원으로 1967년에 훼손된 것을 복원시켰다. 황해도 백천(白川)에 문회서원(文會書院)에서 그를 제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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