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세계사를 뒤 흔든 소금(Ⅱ)
칼럼-세계사를 뒤 흔든 소금(Ⅱ)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11.26 18:3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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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세계사를 뒤 흔든 소금(Ⅱ)


제네바와 베네치아는 중세 소금교역을 놓고 전쟁까지 불사했다. 그만큼 수익이 컸던 장사였다. 당시의 해적들이 주로 노렸던 것도 소금 배였다. 암염광(巖鹽鑛)이 발견되어 동유럽 소금의 유통지가 된 잘츠부르크(Salzburg)는 이름 자체가 ‘소금 성’이라는 뜻이다. 이곳의 영주인 주교와 독일 황제 사이에 소금 독점을 위한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소금을 만드는 집을 뜻하는 독일어의 할레(Halle, Hallerin, La Salle)등은 모두 소금 생산과 관련된 이름으로 소금 생산이 도시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솔트 레이크시티도 소금과 관련된 지명이고, 터키의 투즐라도 소금 생산에서 유래했다. 불리비아의 살라 데 우유니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염전이 있었으며, 관광객이 머물 수 있는 소금 호텔이 있다. 콜롬비아에는 커다란 소금 동굴 속에 지어진 소금 성당이 유명하다. 폴란드 크라쿠프 근처 비엘리치카 지하에 있는 소금 중앙 홀, 성당, 지하 호수 등은 수많은 관광객을 끌고 있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중국에서 본 소금에 대한 이야기를 곳곳에 담아냈다. 신대륙 아메리카의 역사는 소금 전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스페인과 영국 사람들은 식민지 지배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소금 각축전을 벌였고, 인디언·잉카·아즈텍·마야문명의 통치권은 곧 소금의 지배권을 의미했다. 식민지의 반란, 즉 미국의 독립전쟁에 영국은 소금 봉쇄로 맞섰다. 북미에서 소금 투쟁의 역사는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대포는 남부의 소금 공장을 조준했다. 남부군은 소금 제조업자들의 병역을 면제해야 했고, 소금 공장은 탈영병들로 넘쳐났다. 남부 연맹은 소금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시아 흉노의 후예로 유목민족인 그들은 초원의 먹거리가 모자라면 약탈과 정복전쟁으로 먹고 살았다. 이는 중세의 전형적인 부(富)의 획득 수단이기도 했다. 염전이 있는 곳에서는 소금의 독점권을 둘러싼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소금 확보를 위해 1250년부터 약 120년간에 걸쳐 네 차례의 전쟁을 치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1380년 전투에서 승리한 베네치아는 이후 100년간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리면서 동방무역을 독점해 중세 유럽 최강국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역사에 기록된 소금 전쟁은 여럿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일어났던 1611년의 ‘소금 전쟁’도 빠질 수 없다. 우리 삼국시대에도 소금 분쟁이 있었다. 680년 신라와 당나라 간에도 서해안 염전을 둘러싼 관할권 분쟁이 있었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신교도 전쟁 역시, 이베리아 반도의 주요 소금 생산지를 봉쇄한 것이 이유가 됐다. 미국 남북전쟁 기간 중이던 1864년, 북군이 버지니아 주 소금 산지인 솔트빌을 점령한 사건은 남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90년대 칠레와 페루 간 태평양 전쟁은 안데스 산맥의 암염(노천 염)산 쟁탈전이었으며 1893년 미국 기병대와 인디언 수(Sioux)족 사이의 로키 산맥 암염(소금 산)쟁탈 전쟁도 있었다. 중세 유럽인들에게는 오래도록 간직 할 수 있는 소금에 절인 생선과 돼지고기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겨우살이 준비로 가을에 겨울 음식을 준비했는데 주로 청어, 고등어, 연어, 농어, 뱀장어, 대구 등으로 염장을 만들어 먹었다. 식량이 부족했던 당시 소금에 절인 물고기들은 전 유럽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16세기 말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의 독립전쟁이 발생하자 네덜란드계 유대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주요 소금 생산지를 봉쇄했다. 이로 인해 펠리페2세(Felipe Ⅱ) 통치하의 스페인은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성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한편 네덜란드는 막강한 경제력을 축척할 수 있는 소금 채취에 열을 올려 멀리 서인도제도에서도 소금을 공수했다. 17세기 초 베네수엘라의 아라야 갯벌 주변에 쌓인 엄청난 소금 퇴적물 채굴을 시작해 베네수엘라와 네덜란드 사이에 매년 100여 척의 배들이 오고 갔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강력한 해상 무역국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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