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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조선시대 암행어사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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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29  18: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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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조선시대 암행어사

조선시대 임시관직 일명 수의, 직지(直指)등 임금 직속으로 몰래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관들의 잘못을 살피고 백성의 사정을 조사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암행어사는 각종 어사중의 하나이다. 다른 어사와는 달리 임명과 임무가 일체비밀인 것이 특색이다. 이 제도의 기원은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헌부의 관원이나 임금의 측근자가 지방에 파견될 경우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데 관리하도록 남몰래 행동했는데 이들의 직책이 뒤의 암행어사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록상으로 암행어사의 말이 처음 나오기는 중종실록이지만 암행엉사가 자주 파견되기는 인조 이후였으며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점차 제도를 발달하여 전기에는 좀처럼 볼 수 없던 암행어사가 후기에는 ‘어사’라 하여 일반화 되었다.

암행어사는 임금이 신임하는 젊은 당하관 중에서 임명, 이것이 제도화 됨에 따라 중신(重臣)이 적임자를 추천하면 그 중에서 뽑도록 되었다.

암행어사로 결정되어 임금이 봉서(封書) 1통을 주면 자기집도 들르지 않고 즉시 출발해야 하는데 그 봉서의 겉에 “到南大門外開岓”이라 써서 남대문 밖에 나가서 뜯어 보도록 되어 있었다 한다. 봉서의 내용은 누구의 무슨 도(道)의 암행어사로 삼는다는 것과 특히 내려가서 살펴볼 일에 대한 명령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만일 도성안에서 뜯어 본다든지 또는 출발뒤에 봉서를 가지고 자기집에가면 처벌당하였고 의정부에서의 사목(事目)1권 마패 유척등 주었다. 임무가 끝나면 모든 물품을 반납하였다. 관찰사와 대등한 권한을 부여하였으며 필요할 때 마패로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잘못한 수령은 즉시 관인을 빼앗고 봉고 파직하였다. 직책은 감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방관을 대신하여 재판도 하였다.

임무가 끝나면 중앙에 돌아와서 1통의 서계와 별단을 임금에게 바쳤다. 서계에는 전·현직 관찰사 수령의 잘잘못을 적고 별단에는 민정 군정 미담 열녀 효자의 행적 등 적었는데 임금은 이것을 비변사에 내려 처리토록 하였다. 이 제도는 많은 효과를 거두었으며 숙종 이후에 있어 암행어사의 본래 사명과는 달리 반대당을 공격하고 자기편을 두둔하는 편당적인 색채를 띄게 되었다. 고관들은 자기의 비행들을 감추기 위해 어사를 탄핵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부패한 사회에서는 암행어사의 파견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1892년(고종29년) 전라도 암행어사로 이면상을 임명한 것을 최후로 폐지되었다.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같은 대학자들도 조선후기에 혼란된 정치에 꼭 있어야할 제도라 생각하였으며 아쉬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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