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세계사를 뒤 흔든 소금(Ⅲ)
칼럼-세계사를 뒤 흔든 소금(Ⅲ)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12.03 18:3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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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세계사를 뒤 흔든 소금(Ⅲ)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은 고가품과 필수품을 통제하고 지배함으로써 권력과 부를 누렸다. 16세 말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신교도 전쟁은 소금과 식민지 노예 등의 문제가 원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왕권을 유지하기 우해 소금세를 올렸다. 만인의 것이었기에 소금에는 세금을 부과하기가 편했다. 이러한 간접세는 차차 담배 등의 다른 생필품에도 번져 서민들의 살림살이를 옥죄어 가기도 했다. 9세기 당나라 말기에 황소(黃巢)는 과거에 합격해 관리가 되고자 했으나 여러 차례 낙방하자 소금 장사를 시작하다가 875년 소금 밀매상 왕선지(王仙芝)가 일으킨 반란에 호응해 군사를 일으켰다. 가는 곳마다 관군을 무찔러 강남 일대를 장악했다. 880년에는 양쯔 강과 뤄양을 점령했다. 빈농과 유민들을 끌어들여 힘을 키운 이들은 당시 수도 장안을 일시에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를 일컬어 ‘황소의 난(黃巢-亂)’이라고 한다. 이로써 귀족과 관료들에게 큰 타격을 줌으로써 당나라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황소를 비롯한 난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소금을 싸게 밀매하던 소금상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전매제도를 악용해 왕이 소금 값을 과도하게 올리려 할 때 소금 밀매업자들이 들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밀매업자들은 관염(官鹽:정부가 공식적으로 판매하는 소금)보다 질 좋은 소금을 반값에 판매했다. 정부는 이런 자들을 잡아 한 섬 이상 거래한 자는 사형, 한 말 이상 거래한 자에게는 태형을 가했지만 결코 이을 없애지는 못했다.

중국에서는 소금 산지가 일정 지역에 편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독점할 수만 있다면 엄청남 부가 보장되었다. 소금을 쟁탈하기 위해 전쟁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한 무제(武帝) 이후 정부에서는 소금을 전매하여 부족한 재정을 메우고 있었다. 당시 사염(私鹽)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소금을 밀매하는 자는 왼쪽 발가락을 자르는 형벌을 받았다. 당나라도 안사(安史)의 난(亂) 이후 소금 전매에 의존해 극심한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했다. 실제 소금 전매수입은 총 재정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전매 이전에는 한 말에 10전 하던 소금 값이 110전으로 오르더니, 급기야 300전에 달했다. 소금이 생존의 필수품인 이상, 가장 큰 피해자는 농민들이었다. 안사의 난 이후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당의 궁중에서는 독버섯처럼 환관들의 세력이 자라나 허약한 황실을 쥐고 흔들었다. 황제는 이들에 의해 세워지고 폐해지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관에서 주도하는 전매제의 소금 값이 급등하게 되면 자연히 암거래가 생겨난다. 정부는 이들을 추적해 사형 등 중형으로 가혹하게 처리했다. 이렇게 되면, 소금 밀매조직들은 좀 더 적극적인 자위책을 찾아 무장봉기의 길에 나서게 된다. 이후 명나라 때는 만리장성 변방 창고에 군량을 대주는 거상(巨商)들에게 관염판매허가증을 내주었다. 허가증 발급만으로도 만리장성 수비에 필요한 막대한 군비를 조달할 수 있었던 셈이다.

1825년, 영국은 염세(鹽稅)를 폐지한 최초의 국가다. 수 세기 동안 징수한 염세에 노동자 계급이 분노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금의 역할이 바뀌었다는 걸 영국 정부가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산업혁명은 기계혁명으로 알려졌지만 한편으론 화학혁명이기도 했다. 섬유산업, 염색, 비누제조, 유리 제조, 요업, 철강 산업, 무두질, 제지업, 양조 산업 등에 대한 수요 때문에 화학물질을 대량생산할 필요성이 생겼다. 소금은 방부제나 조미료서의 중요성보다 화학물질 제조공정에 필요한 물질로서 중요성이 엄청나게 커졌다. 때문에 각종 제조업들의 공장 소유주들은 염세를 철회하라는 압력을 정부에 가했다. 소금이 영국 산업 번영의 핵심 원료라는 인식을 정부가 하자 비로소 가난한 사람들이 수 세기 동안 그토록 원했던 염세 폐지가 실현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본토의 염세는 폐지했지만 식민지의 염세는 폐지하지 않았다. 인도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이 부과한 염세에 반대하기 시작하면서 염세는 인도에서 식민지 압제의 상징이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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