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의 詩 산책-화양연화,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김지율의 詩 산책-화양연화,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12.19 18:48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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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

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화양연화,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 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 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김사인,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화양연화’라 한다면, 이번 생에서 그런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잠시 헤아려 봅니다. 글쎄요, 그런 시절이 지나갔을 수도 있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 시는 나와 함께 지냈던 그런 날들을 떠나보내는 시인의 아련한 마음이 오래 느껴집니다.

시인의 말처럼 기쁘고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어나가거나, 덧없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지나가버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홍 머리핀’처럼 언제 잃어버렸는지, 어디서 떨어뜨렸는지 모른 채 무심한 듯 그렇게 말이죠. ‘아무도’ 맞당겨 주지 않고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쳐다봐주지 않는 ‘눈멀고 귀먹은 시간’과 겨울 숲처럼 그런 황량하고 ‘애닯지 않는 시간’이 오더라도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에서 스물여섯 벌의 화려한 치파오를 입었던 장만옥의 모습은 정말 멋집니다. 하지만 그보다 자신의 소심했던 사랑의 비밀을 앙코르와트 사원의 벽에 대고 속삭이는 양조위의 뒷모습이 더 오래 남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가 돌 속에 귓속말하듯 속삭인 말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 시절은 지나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요. 내킹콜의 ‘Quizas, Quizas, Quizas’나 우메바야시 시게루의 음악이 더없이 절묘했던 영화 속 ‘화양연화’의 날들. 이 시에서처럼 누구든 이제 ‘슬픔이 없는 나라’로 가서 ‘철모르는 오누이처럼’ 아무도 모르게 살라는 당부를 생각하게 하기도 합니다. 혹은 아직 인생의 화양연화를 누리지 못한 채 안타깝게 죽은 많은 이들에게 들려주고픈 시이기도 합니다.

또 한 해를 보내야 하는 이즈음 지나간 많은 날들을 되돌아봅니다. 곁에 있었던 혹은 멀리 서라도 오래 보고 싶었던 이들을 잃었고, 그들과의 기억 속에서 오래 서성거립니다. 그러게요. 한 번 더 연락하고 한 번 더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게 매일 바쁘게 아등바등했네요. 불판 위에 삼겹살이 구워지고 소주잔에 맑은 눈물이 글썽거릴 때 문득 고개 들면 모르는 누군가의 등에서도 쓸쓸한 화양연화의 그림자를 봅니다. 당신과 나의 ‘화양연화’는 어쩌면 이 현실을 견디게 하는 삶에 대한 갈망이며, 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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