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과 빈말
막말과 빈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4.2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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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현옥/작가ㆍ약사
알다시피 선거일은 임시휴일이다. 미국처럼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말인즉 투표소가 띄엄띄엄 있어 투표하러 가기 힘든 나라라는 뜻)도 아닌데 웬 휴일이냐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나는 지난 4월 11일 임시휴일임에도, 아니 임시휴일이라서 더 일찍, 일을 하러 나가야 했다.

개표 상황을 근무지에서 PC를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투표함을 처음 열었을 때의 분위기와 달리 막바지에 이르러 여당의 과반 의석 확보가 확실시되자 이 결과의 일등공신은 서울의 김용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수도권을 제외한 동쪽 모두를 붉게 물들인 이 판세를 만든 1차 책임은 물론 야당에 있다. 심판론을 제치고 차별론이 부상하는 것도 모르고 ‘닥치고 찍으라’고만 했던 그들이 아닌가. 죽 쒀서 뭐 준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끼리끼리 동종교배에 몰두하며 자만하는 사이 침묵하는 다수가 제 소리를 냈고 그 열매는 고스란히 여당에게 돌아갔다. 이토록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하니 야당이 패배한 것도 당연하다.

막말을 내버려둔 책임으로부터 우리 모두 자유롭지 못하다. 당신은 혹 반말과 욕설에 쾌감을 느끼지 않았는가. 분노에 찬 말이 쏟아질 때 대리만족을 느끼지는 않았는가. 어눌하지만 진지하고 무거운 말보다는 내지르고 내뱉는 단문에 매료되고 열광하지는 않았는가.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인기 있는 글은, 내가 아는 한 거친 표현인 경우가 많다. 짐짓 위악을 떨며 우라질, 제기랄 같은 감탄사와 “ㅅㅂ”, “조낸” 등 정체불명의 부사를 쏟아 내거나 소위 쿨한 척 어깨를 으쓱 올리는 미국식 몸짓이 느껴지는 그런 글들 말이다. 진지함은 어눌함이나 재미없음, 때로 개념 없음으로 치부되고 경원시하기까지 하는 분위기 속에 나는 가만히 그런 글을 읽고 댓글(그 수많은 댓글이라니!)도 읽는다. 나는, 그야말로 가만히 읽는다. 읽고 조용히 있다고 해서 긍정하고 동조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재기발랄한 글들 속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자신하는 거드름피우기도 보이고 존재이유를 찾는 안쓰러운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일은 언제 하고 연구는 언제 하고 사랑은 언제 하는지. 하긴 연인들조차도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왔을 때 눈빛이 가장 초롱초롱했다는 외신 보도도 있었으니 어련할까. 막말의 수위가 넘치고 넘쳐서 이제 웬만한 것에는 반응도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총선을 치렀다. 사필귀정이다.

내지르고 내뱉고 소리치는 막말의 한 편에 빈말이 있다. 이번 총선에도 수많은 공약이 나왔다. 모든 국민을 어떻게 다 만족시키겠다는 것인지 밑그림 하나 없이 공약(空約)이 될 게 뻔한, 빤한 거짓말 들을 쏟아내었다. 듣고 있으면 어지럼증이 나는 무책임한 약속들이 난무했다.

빈말은 달콤하고 나긋나긋하게 사람의 간지럼을 태운다. 빈말은 또한 자신 없는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도 한다. 귀를 막아 진실을 멀리하게 만들며 자아도취에 빠지게 한다. 빈말에 취해 거짓 희망을 품는 대가로 소중한 꿈을 내어주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빈말은 이처럼 교묘하고 은밀하다는 점에서 막말보다 그 폐해가 더 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자성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외양간을 두 번 잃어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고 빈정대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나라의 대사가 남아 있다. 나라의 큰일 앞에는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

올해 한 번 더 남은 선거에서는 모두가 조금씩 거리를 좁혀 가운데로 와야 하지 않을까. 막말을 추방하고 빈말을 혐오해야 맞다. 이것만 가려낼 수 있어도 새벽 같이 일어나 투표하는 보람이 있을 것이며 나아가 나라의 장래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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