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해바라기즘’과 ‘개구리즘’
아침을 열며-‘해바라기즘’과 ‘개구리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1.14 18:2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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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해바라기즘’과 ‘개구리즘’


‘내가 최고’, ‘우리가 최고’ 라는 사람을 주변에서 적지 않게 목격한다. 그 ‘우리’에는 이른바 패거리-진영-계층 같은 것도 있고 나라도 있다. 예전엔 거기 가문도 있었고 당파도 있었다. 거기엔 어떤 특유의 착각과 고집과 오만이 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무의식적인 어떤 열등감 내지 콤플렉스가, 혹은 어떤 야만성-침략성이 깔려 있을 수도 있다. 사람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다. 보이지 않는 정신의 눈도 그렇다. 그 하나는 안을 바라보는 눈이고 다른 하나는 밖을 바라보는 눈이다. 개인도 집단도 국가도 마찬가지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안을 바라보는 눈이 극도로 발달한 나라가 인도이고 밖을 바라보는 것이 극도로 발달한 나라가 일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도의 경우 그 명상문화가 아마 한 증거가 될 것이다. 불교의 이른바 유식론도 그중 하나다)

밖을 내다보는 일본의 그 눈, 그 정신을 나는 ‘해바라기즘’이라 부른 적이 있다. (그들도 몰랐겠지만 그것은 그들의 국기에도 드러나 있다. 그들은 ‘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내다보기즘’이라고 불러도 좋다.) 일본은 섬나라다. 그래서 안과 밖이 명확하다. 더구나 그것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구조적으로 바깥에 대한 호기심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의 초창기부터 바깥을 내다봤다. 그 바깥에 뭔가 ‘좋은 것’이 있는 것이다. 그 상징이 바로 ‘해’다. 그들의 눈은 그 ‘해’를 따라 돌았다. 그게 일본의 역사다. 그래서 일본은 하나의 해바라기다. 일본이라는 해바라기가 최초로 바라본 해는 가까운 ‘가야/가라/가락’이었다. 그 철의 문화였다. 그러나 해는 움직인다. 해바라기의 고개는 그 해를 따라서 돈다. 그 다음에 바라본 해가 신라-백제-고구려였다. 그 흔적 내지 증거는 그들의 유물-유적 가운데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백제관음, 황실 창고 쇼소인의 신라 수저들, 겐지이야기에 등장하는 고구려 관상가 등등) 그 다음의 해가 당이었다. (그들은 당을 ‘가라’라고 읽는다. 가야라는 해의 흔적 혹은 잔상이다. 견수사 견당사 등을 시작으로 그들은 활발하게 중국의 문명을 흡수했다. 그 다음이 우연히 도래한 ‘남만’(서양-유럽)이었다. 구체적으로는 포르트갈-네덜란드[홀란드]였다.(서양의 학문을 ‘란학’이라 불렀던 것도 ‘오란다’ 즉 홀란드의 흔적이다.) 그 다음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핵심국가들이었고 그 다음이 바로 미국이었다. 일본이라는 해바라기는 그렇게 해의 위치변화를 충실히 추적하면서 지구를 한 바퀴 빙 돌아 지금 미국이라는 해를 바라보고 있다. 해바라기의 큰 장점은 그 바라기의 결과로 고소하고 영양가 있는 씨앗을 남긴다는 점이다. 그게 지금의 일본이다. 특히 일본의 문화다. 그들의 국력도 그렇게 해서 자라났다.

그런데 이런 해바라기즘은 실은 일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것이 있다. (그리고 실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본질적 성향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주로 중국에 머물러 있어 서양이라는 해를 제때에 보지 못한 우를 범하기도 했다. 그래서 근대화에 뒤진 측면이 있다.

이 해바라기즘의 반대현상이 있다. 바깥의 좋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혹은 진영 안에) 갇혀 ‘에헴’하고 잘난 채 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꼴불견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다. (내가 지향하는 공화주의를 심각하게 저해한다. 그 적이다.) 나는 그것을 개구리즘(우물 안 개구리즘/정중지와이즘)이라 부른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그 잘못을 ‘동굴의 우상’이라 부르기도 했다. 알다시피 그런 지적의 원조는 플라톤이다.(동굴의 비유) 여기엔 특유의 폐쇄주의가 있다. 쇄국정책의 뿌리도 거기에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퇴라 했다. 피기(彼己)는 아타(我他)이기도 하고 안팎-내외(內外)이기도 하다. 타는 사실 아의 거울이기도 하므로 바깥의 좋은 것을 모르면 자신의 정확한 상태를 알 수도 없다.

우리 주변엔 바깥세상을 모르는 개구리들이 의외로 많다. 더욱이 그들은 개굴개굴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그들보다는 차라리 조용히 해를 바라보고 맛있는 씨앗을 익혀가는 해바라기가 백배 낫다. 해는 바깥에, 하늘에 언제나 있다. 그것은 거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그 해는 어디에 있는가. 끊임없이 바깥을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보면 이른바 진리탐구라는 것도 일종의 해바라기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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