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北·美회담 北 핵의 폐기가 먼저다
칼럼-北·美회담 北 핵의 폐기가 먼저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1.20 18:4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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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홍/김동리 다솔문학 협회 회장ㆍ시인ㆍ작가

황규홍/김동리 다솔문학 협회 회장ㆍ시인ㆍ작가-北·美회담 北 핵의 폐기가 먼저다


한반도의 안보가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된다면 아마도 미국은 주한미군 축소 또는 철수까지 나올 수 있다는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는 모양새다. 우려가 현실화되는 경우 우리나라는 위기에 처할 수 도 있다. 한반도 비핵화가 무너지면 핵을 보장하는 상태로 미국과 중국의 마음이 합치되어 있는 상태로 볼 수밖에 없고, 평화체제의 길은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 시기에 북·미회담을 베트남에서 연다고 하니 서로를 비교하여 볼 수밖에 없다. 베트남 전쟁에서 월맹은 남쪽 월남에 게릴라 전술로 베트콩(좌파의 활동)이 농민운동, 전교조, 민주투쟁 운동 등 지금 우리나와 마찬가지로 남쪽 전역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남쪽 구축의 심도는 멀리가고 만다. 커다란 징검다리를 놓게 만들려고 하면서, 국민들에게 기대를 걸게 만드는 것이 물거품이 된다. 하노이 전쟁당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닉슨 대통령들의 지원과 개입, 참전 확정, 철수의 수순을 밟은 전쟁이다. 그리고 미국이 패전한 유일한 전쟁이다. 1965년 월남전 파병 논의가 한창이던 때 베트남 전쟁을 깊이 생각하면 미국은 왜 베트남전쟁을 일으켰나하는 근현대사가 똑바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때의 전술이 북한이 의도하며 선호하는 노선처럼 닮은꼴로 가기 때문에 좀 비교를 해야 된다고 본다.

모두 2차 세계대전 이전에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던 ‘인도차이나’ 호치민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고 베트남 공산당을 이끌던 호치민이 북쪽에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여 독립선언을 하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계속 지배권 주장을 하며 인도차이나 전쟁을 발발 하였다. 화력의 우세가 곧 전쟁의 승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중국의 군사 원조와 시민, 농민들의 지지 그리고 호치민의 게릴라 전략 전술이 잘 훈련되어 있었다. 결국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제네바 휴전협정을 맺게 되는데, 호치민 공산 혁명으로 독립을 이끈 베트남 제1대 국가주석 호치민이 이끄는 공산주의 북베트남이 미국의 지원으로 탄생한 남베트남 정권과 서로 다르게 되었다. 미국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은 세계 패권과 공산주의와의 냉전에서 승리가 목표였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밀리는 현상이 벌어졌다. 북한, 중국, 북베트남, 소련이 서로가 공산국가로 상대를 하기 위하여 남한, 일본, 타이완, 남베트남 등과 서로 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전술적 목표가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가 공산화된다고 생각한 미국이었다. 그것은 곧 동남아시아 필리핀, 괌 사이판, 인도네시아 지대에서 섬으로만 이뤄진 방어선을 형성하여 공산주의 확산은 막아야 했다. 즉시 남베트남 지원 강화를 하며 이때의 군사력은 남베트남 주둔 미 군사요원 수 1960년-685명, 1961년-3164명, 1963년-1만 6263명으로 베트남 전쟁이 확산되었다. 드디어 남베트남 병력이 24만 명에서 51만 명으로 상승하였다. 문제는 남베트남의 내부 상황이었다. 불교를 탄압하여 남베트남 정권에 분신자살로 저항한 틱꽝득 스님 그로 인해 불교도와 대학생들이 4개 도시에서 데모하는 한편 남베트남 군부에서는 쿠테타 음모가 진행되었다. 통킹만 사건(1964. 8. 2) 미 함대가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하였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직접 참가하였다. 그러나 1972년 미국이 공격해 유발된 것이라고 폭로하였다. 1965년 미군 18만 4000여명이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미군은 총 54만 명이 참전하고, 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은 8년간 총 31만 2835명이 파병을 하였다. 소련, 중국, 북한은 북베트남을 지원하였다. 1965년에서 1968년까지 약 30만 명의 중국인이 북베트남을 지원하였다. 베트남 통일 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1968년 1월 31일 구정 대공세로 월맹이 공격을 하였다. 호치민이 주둔하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을 공격하여 베트남 전쟁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환점이 되었다. 구정대공세 이후 미국의 상황은 종전을 원하는 여론과 더불어 존슨 대통령 지지율 추락으로 결국 미 대통령이 존슨에서 닉슨으로 바뀌었다. 남베트남을 포기하되 패배는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리처드 닉슨은 사실상 지상군을 철수하겠다고 발표를 하였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초기 목표는 공산주의 저지였다. 결국 1973년 파리평화협정 이후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 종전 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1975년 4월 30일 공산주의 국가로 베트남은 통일이 되었다. 그 여파로 인접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공산화되고 말았다. 이 예를 볼 때 북의 핵 포기를 북·미 회담에서 꼭 받아내야 하고 양보가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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