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언어를 갖는 삶
자기의 언어를 갖는 삶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4.25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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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수/민들레 공동체 대표
아버지는 말씀을 많이 하시는 분은 아니셨다. 그저 자신의 맡은 일을 충실히 하셨고 평생 가족을 지키느라 애쓰셨다. 일제시대의 고통과 분단과 이산을 그리고 전쟁을 경험하셨고 가난을 이겨내고자 안해본 일이 없었던 의지의 한국인 중의 한분이셨다. 힘든 삶이었지만 그런 와중에서 산과 돌과 화초를 좋아하셨고 자신의 삶을 가꾸기에 게을리하신 분이 아니었다. 이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견디어내라. 낙관하라”는 메시지였다. 아버지의 이 무언의 언어는 여전히 나에게도 전수되어 내가 살아가는 근간이 되었다. 삶은 견디어 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삶의 희망을 낙관하라는 것이다.

한 사람은 많은 유산을 남기기 어렵다. 그는 한 생애를 살기 때문이다. 한 생애는 한 언어를 남기고 떠날 따름이다. 유언을 남길 때 그 유언은 적어도 자기 가족들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남은 자들의 삶에 방향을 제시하고 마음을 흔든다. 그러나 그 유언조차 빈약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한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한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그 자신의 언어를 갖도록 할 것이다. 그 어느 세대보다 엄청난 분량의 정보와 지식과 경험이 폭주하지만 자신의 언어를 가진 사람, 자신의 가치와 자신의 사상을 가진 사람은 눈 뜨고 볼래야 찾기 어렵다. 다들 이익에 따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거나 두 번 눈길 돌릴 가치가 없는 일에 시간을 탕진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자기 자신만의 언어는 어디에서 잉태되고 어떻게 내면화되고 또 어떻게 세대에 확산되는가. 이순신장군은 무릇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라는 정신으로 충(忠)을 이루어내었고, 부처는 인생고해를 벗어남이 삶의 목적임을 설파했다. 자신만의 언어는 공부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생애를 거는 전심전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생애를 걸고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을 우리는 의(義)라고 일컫는다. 진정한 언어는 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때로는 예언자의 언어로, 때로는 자연 속의 신비 속에서, 때로는 사람 속의 탄식 속에서 발견되어진다.

우리 모두는 예언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적어도 이렇게는 살아야되지 않겠느냐”는 절실함 속에서 삶을 이끌어가는 예언이 시작된다. 그 절실함 속에서 자신의 언어가 세워질 수 있다. 무엇보다 이웃의 탄식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고, 자기중심적 삶에서 타자중심적 삶에 다가갈 용기가 시작될 때, 자신의 언어가 잉태되고 자라기 시작한다. 그래서 세상을 사심없이 산 사람은 부끄럼 없이 자신의 삶과 언어를 후대에 전할 수 있는 권위가 부여된다. 시인과 과학자는 자연의 해석자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풀어내기에 그들이 과학적 보고서를 작성하든, 시를 쓰든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언어에 귀를 기울인다.

인류의 가치는 언어로 전승된다. 이야기와 연극, 글로써 이어진다. 생명, 정의, 평화, 사랑, 우정, 행복, 지속성, 소박함, 영원함, 아름다움…  이 언어 하나하나를 지켜내기 위해 생애를 걸고 애썼던 사람들에 의해 그 뜻이 이어져왔다.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의 삶과 자기의 언어를 갖도록 도전하는 것이다. 자기 집을 갖고 자기 가족을 갖고 자기 소유를 갖도록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삶을 흉내내고 남의 지식을 흉내내고 남의 문화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지켜낼 만한 가치있는 자기의 삶과 자기의 언어를 갖도록 도전하는 것이다. 교육은 이 아름답고 거룩하고 능력있는 언어들이 조화롭고 빛나게 세상에 흘러 넘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노력이다. 이제라도 자신의 언어를 갖자. 이제라도 자신의 언어를 갖는 자녀를 길러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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