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일본 왕이 은사금(恩賜金) 준 목적
진주성-일본 왕이 은사금(恩賜金) 준 목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1.30 19:4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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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일본 왕이 은사금(恩賜金) 준 목적


1910년 8월 29일 강압적으로 한일합방(韓日合邦)이 성사되자 일본 전역은 축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일제(日帝)는 즉시 1910년 10월은 일본 왕이 소위 은사금(恩賜金)을 내려 주게 되는데 우리로서는 치욕(恥辱)의 달이다. 일본 왕은 한일합방(韓日合邦)에 공로가 큰 이완용(李完用)에게 20만원(100억 상당)을 지급하고 이재면에게는 가장 큰 금액 166억을 지급하고 각 대신 급에게는 15만원(75억)씩 지급하고 을사오적에게도 15만원, 고문 급에게도 5만원, 그 외 국장급에게도 2~3만원, 진주 뒤벼리 바위에 새겨진 이재각, 성기운 등과 이미 사망한 대신 급에게도 각각 3~10만원을 지급했다.

친일파들은 은사금으로 전국에 땅을 사고, 파는 등 투기를 시작해 근대사 최초(最初)의 투기자들이 되었고 손자. 증손자까지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부호(富豪)가 되었다.

시·도에도 천황(天皇) 은사금이란 이름으로 지급되었는데 부산 6만 9800원. 진주 8만 3200원, 하동 6만 200원, 고성 6만 3200원, 곤양 4만 1300원, 산청 4만 9500원, 남해 5만 2600원, 사천 4만 1300원을 지급했다.

각 개인별로도 고령자들, 고아, 과부, 홀로 사는 노인들, 효행자, 각 고을의 친일 공로자들을 찾아 10원에서 500원을 지급했다.

이 때 부터 조선 전국은 쥐 죽은 것처럼 조용해 졌는데 돈의 위력이 대단함을 실감하게 된다. 1905년~1909년 사이 전국적(全國的)으로 치열했던 의병(義兵) 투쟁은 어디로 가고 잠잠해 진 것은 물론 일제가 고마운 존재로 부각되고 의병은 반대로 역적(逆賊)으로 인식되고 의병했던 자들을 잡아 주거나 고발하는 일들이 자주 발생했다.

또 일본 말을 배우는 열기가 크게 일어나 개인 강습소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기고 종교 시설에서도 일본어(日本語) 강습소(講習所)가 생기는 희안하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조선인(朝鮮人)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쓸게 빠진 놈들이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1910년 10월부터 일본 왕의 특사(特赦)라는 이름으로 옥중(獄中) 죄인(罪人)들을 대거 석방하거나 형벌(刑罰)을 감형(減刑)하는 정책을 펼치니 일제에 대한 불만은 점차 사라져 버렸다.

친일파(親日派)들은 일본 관광단을 조직해 이재극과 부인. 이완용(李完用)과 부인, 조중응과 부인, 윤덕영과 부인, 박제순과 부인 등은 간호사 2명, 의사 1명을 대동하고 부산(釜山)을 거쳐 일본 동경(東京), 대판(大阪) 등지로 유람(遊覽)하며 즐겼다.

일본 왕이 조선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소위 은사금을 주었고 북한의 김정은도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목적으로 배려금을 지급한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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