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공동체 더딘 공동체
느린 공동체 더딘 공동체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4.29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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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조/premiere 발레단 단장
최근 들어 인문학계에서는 ‘공동체’를 둘러싼 많은 논의들이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조그마한 이야기를 면밀하게 들여다보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이런저런 논의가 아직은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두어달 쯤 전 같이 모여 공부를 하는 몇 몇 지인들과 이 관심사를 갖고 이야기를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대화를 통해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들을 간단하게나마 적어 내려가고자 한다.

우선은 ‘미시화微視化’의 진행이 더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공동체 - 그 공동체의 모습이 어떠하건 간에 상관없이 - 를 이루는 각각의 구성원이 갖고 있는 모든 차이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장이 형성되지 않는 한 공동체와 관련된 여러 논의가 아직은 시기상조가 아닐까. ‘합리성’의 문제도 있다. ‘합리성’, 이치에 맞는 것이 합리성인데 그것이 많은 왜곡과 훼손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그 합리의 ‘리理’가 마치 인간 이성만을 의미하는 듯한 느낌이 적지 않다. 근대적 합리성은 인간 이성에 의해 인식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고, 동시에 이 같은 구별이 어떻게 역사적 정당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 온 노고의 결과물이다.

 “합리성이 논리에 기반해 있”고, “논리의 세계는 일관성과 통일성으로 관리되며, 수직적 비약이 되지 않는 세계이므로 지속적으로 자신의 경계를 확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면 합리성과 그것을 낳은 인간 이성은 가히 폭력적이라고까지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문화의 풍경, 이론의 자리'이경, 박훈하, 김용규 지음, 비온후, 62쪽). 그리고 이러한 이성의 폭력성은 실제로도 이미 오랫동안 고발되어 왔다. 그리고 공동체를 운영함에 있어 ‘합리성’과 더불어 요구되는 또 다른 중요한 특성들인 ‘효율성’과 ‘합목적성’도 있다. 공동체는 이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을까. 이들 중 하나라도 희생되는 것을 공동체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가령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구성원의 의사소통을 생각해 보자.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일견하기에 비효율적인 상황도 함께 고려되어야 할지 모른다. 각각의 구성원이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나머지 모든 구성원들이 끝까지 듣고 보는 일은 효율적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공동체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각각의 목소리에 나머지 사람들이 끝없이 귀를 기울일 것이 요청된다면 그것이 한없이 느리고 한없이 더디더라도 그리 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 과정은 느리고 더뎌 효율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합목적적이기도 할 것이다. 효율성과 합목적성 간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한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룰 수는 없지 않은가.


합리성의 체계라는 것이 끝도 없는 부조리와 불합리성을 잉태하고 있다면, 그것과 정반대의 실험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 ‘역사’는 결코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 이전의 순간은 역사일 수 없다.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성원이 살아가고 있는 한 순간, 한 순간은 역사가 아니다. ‘역사’란 항상 사후적인 해석의 결과물일 뿐이다. 각각의 성원들이 이룩해 가는 모든 순간들 중 아주 일부만 따로 떼어내어 그것에 의미라는 주석을 붙여 명명한 것이 다름 아닌 역사인 것이다. 역사라는 이름이 붙기 전의 그 모든 순간은 실험이 아닌 순간이 없다. 왜냐햐면 그 순간은 항상 미지의 또 다른 순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코 알 수 없는 시간의 지속 안에서 운동하고 있는 매순간이 어찌 실험이 아닐 수 있겠는가.

지금의 공동체, 한반도의 남쪽에서 7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이 공동체는 과연 그 같은 더디고 느린 공동체를 실험할 수 있을까? 아무리 긍정적인 답을 내어 놓으려 해도 그리 할 수 없다. 이 문제만큼은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부터라도 첫 걸음을 떼어 보는 것은 어떨까? 그 발걸음이 한없이 느리고 더딜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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