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화개장터 3·1운동 유공자들
진주성-화개장터 3·1운동 유공자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2.13 19:0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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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화개장터 3·1운동 유공자들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도 국권(國權)을 회복하고 일제(日帝)를 몰아내기 위해 만세(萬歲)를 고창(高唱)하고 협박문, 경고문을 작성해 사방에 붙이는 투쟁(鬪爭)을 했다.

이강률(1902~1944), 이정철(1897~1949), 임만규(1893~1958)이정수(1888~1953)선생 등은 1919년 4월 6일 쌍계사 스님들과 학생들인 김주석, 정상근, 양봉근 등과 함께 영호남에서 모여든 군중들에게 태극기(太極旗)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지도(指導)하고 고창하였다.

300여 명의 시위 군중들은 점점 늘어나 섬진강(蟾津江) 건너편의 광양군민들도 배를 타고 건너와 합세하니 군중 수는 4백여 명이 되었다.

일경(日警)들은 파장하는 시간에 갑자기 만세소리가 진동(振動)하자 당황하더니 총검(銃劍)을 들고 군중을 향해 달려들어 총을 발사했다.

군중들은 일단 동서로 흩어지기로 하고 물러났다. 제 1차 의거(義擧)에 이어 2차 의거는 4월 11일 더 큰 시위를 준비하게 된다.

이정수, 이강률, 이정철, 임만규 선생 등은 다음과 같은 격문(檄文)을 작성해 4월 10일 밤 화개면사무소 앞에 붙였다.

‘금일 장날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크게 외치고 모두 함께 높이 불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다’
면사무소 직원들에게도 <사직 권고문>을 작성하여 정문에 붙였다.

4월 11일 화개(花開) 장날이 되자 일경이 즉시 출동해 격문(檄文) 글씨와 내용을 보니 이강률, 임만규의 글씨라고 파악하고 체포조가 출동하여 시위를 시작할 시각에 전원 피체(被逮)되었으니 통탄스런 일이다.

하동경찰서로 끌려간 항일투사(抗日鬪士)들은 온 몸에 피멍이 들도록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혼절하였다.

1919년 6월 9일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소위 협박 및 보안법(保安法) 위반(違反)으로 이정수 선생은 징역 10월형이 언도(言渡)되고 임만규, 이강률, 이정철 선생 등은 징역 6월형이 언도되었다.

법적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고 항변했으나 같은 해 7월 4일 각기 10월형과 6월형이 확정(確定)되어 옥고를 치렀다.

필자가 앞장서서 문헌과 재판기록을 찾아 임만규 선생과 이강률 선생을 1993년과 1996년에 각기 대통령 표창을 추서케 했다. 이정수 선생도 이어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케 했다.

화개장터 3·1운동 기념비를 건립해 드려야 되겠다고 작정하고 2001년 3월 화개장터 발상지 옛 면사무소 입구 도로변에 건립해 2백여 명을 모아 제막식을 거행했으나 수년 후 새 화개장터가 조성되자 다시 옮기게 되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청년회에서 기념행사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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