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분열주의와 단합주의(‘나뉘기즘’과 ‘뭉치기즘’)
아침을 열며-분열주의와 단합주의(‘나뉘기즘’과 ‘뭉치기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2.17 18:2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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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분열주의와 단합주의(‘나뉘기즘’과 ‘뭉치기즘’)


근래 여러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는 사건들 중에 성대결 양상을 띤 것들이 하나둘 등장하고 있다.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이라면 여자에게는 남자가, 남자에게는 여자가, 세상 모든 존재 중 가장 좋은 것일 텐데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남혐, 여혐이라는 말이 마치 시대의 유행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물론 그 근저에는 오랜 세월 여자를 ‘인간의 절반’으로 인정-존중하지 않은 남성우월적 행태가 놓여 있다. 우리사회의 남성들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현상인 편가르기를 그리고 그 갈등-대립-다툼을 한탄해왔다. 남북이, 동서가, 상하가(=노사가), 좌우가(=보혁이), 갈가리 찢어져 있는 데다, 전후[세대]-원근[지방/서울]이 대립하더니 이제 마침내 남녀마저 갈라져 맞서게 된 것이다. 단언컨대 이런 현상은 사람을 피폐하게 할 뿐 아니라 망국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이런 [편]가르기즘, 나누기즘, 맞서기즘, 찢어지기즘, 분열주의는 사실 그 뿌리가 깊다. 해석하기에 따라 삼국의 분열과 조선의 저 악명 높은 당쟁도 그것에 해당한다.

물론 세상 만유가 모두 각각 다른 개체인 이상 억지로 하나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가 세포분열로 성체가 되는 이상, 갈라지는 것은 존재의 근본원리에 속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다름과 각각임이 곧 대립과 다툼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맞선다는 것은 ‘저쪽’에 대한 ‘이쪽’의 태도의 문제다. 자신에 대한 그리고 상대에 대한 가치판단이 그 근저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쪽이 옳고 저쪽은 그르고, 이쪽이 맞고 저쪽이 틀리고, 이쪽이 좋고 저쪽은 나쁘고, 이쪽은 잘났고 저쪽은 못났다는 그런 생각이 전제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건 오만이다. 오만은 긍지와 (자만은 자존-자긍과) 전혀 다른 것이다. 오만에는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와 상대에 대한 과소평가가 내재되어 있다. 오만에는 저쪽에 대한, 상대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 하이데거가 알려준 현존재[=인간]의 존재 즉 마음씀(Sorge), 특히 다른 현존재에 대한 ‘배려’(Fuersorge)라는 마음씀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생각 속에, 특히 마음속에 오로지 나와 ‘우리편’만 들어 있지 너-당신 혹은 ‘저들’의 자리가 아예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곧잘 망각하고 있다. 이 모든 분열과 대립이(가르기와 맞서기가) 결국 어떤 인간적 이해관계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을. 이득을 둘러싼 대립이라는 것을. 거기에 ‘나만’ 혹은 ‘우리만’ 그것을 차지하겠다는 (추악하고 살벌한) 욕심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대립에서는 반드시 어느 한쪽의 희생이 동반된다는 것을. 역사상 그 극단의 형태가 주인과 노예의 관계였다.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도 그런 부류다.
어느 한쪽의 희생과 배제가 선이 아님을 인식하는 이성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는-지양하는 노력을 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프레임을 맞서기에서 맞잡기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남북통일을 위한 철학이기도 하고, 마르크스주의와 그리스도주의의 대화를 위한 철학이기도 하다.] 뭉치기-합치기-모이기 그런 삶의 태도가 하나의 ‘이즘’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태도를 나는 단합주의, 단결주의, 뭉치기즘, 합치기즘, 모이기즘이라 부르기도 한다.

맞잡기는 ‘우리’의 틀을 소아에서 대아로 키워준다. 그러면 그만큼 ‘나’ ‘우리’의 힘도 커지게 된다. 혼자서는 꼼짝도 하지 않는 바위조차도 힘을 합치면 간단히 움직일 수가 있다. 그 우리의 단위가 국가사회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구성원이 분열-대립하는 조직과 국가는 절대 힘을 가질 수 없다. 있는 힘조차도 발휘할 수 없다.

대립-갈등-다툼의 많은 부분은 이른바 정의가, 그리고 윤리와 철학이 조정해 줄 수 있다. [벤담의 공리주의, 하버마스의 진리론, 롤스의 정의론, 레비나스의 얼굴론 … 등은 특히 유용하다.] 그렇게 모두의 이익을 위해 나-우리편의 이익을 조절-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내가 지향하는 공화주의다. 좋은 것을 함께 누리자는 것이다. 맞서면 그것은 멀어지고 맞잡으면 그것은 가까워질 수 있다. 우선 남녀부터 손을 맞잡자. (그게 모든 인간적 힘의 원천이었다. 또한 모든 아름다움, 아니 모든 존재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동서-남북-상하-좌우-전후-원근으로 그 범위를 넓혀나가자. 그 끝에서 ‘선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맞잡기만 제대로 돼도 세상은 거의 유토피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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