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휴, 아름다울 휴
쉴 휴, 아름다울 휴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6.27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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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옥/작가ㆍ약사
 태풍 메아리가 온 땅을 뒤집어놓을 듯 거세더니 조금 잠잠해졌다. 성급한 사람들은 이 장마와 바람이 지나면 휴가를 떠날 것이다. 곧 7월, 휴가철의 시작이다.
한글 워드에서 '휴'를 쓰고 단축키 F9을 누르면 사람 인 변에 나무 목으로 이루어진 한자가 뜬다. 休. 그동안 이 글자에 한 번도 주목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모름지기 사람은 나무, 자연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休는 사람 人변에 나무 木이 더하여 생긴 회의(會意) 글자로 그 원 뜻은 ‘쉬다’지만 천자문(주흥사의 천자문 속에는 없는 글자입니다)식 단순명쾌한 뜻만 가지고 있다면 한자, 아니 한문을 어찌 어렵다고 하겠습니까.”
한학을 공부하는 한 지인의 말이다.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는 형상이라고 대단한 발견을 한 듯 호들갑을 떨었지만 休는 논문을 써도 될 만큼 많은 뜻과 쓰임을 가진 글자였다. 지인의 가르침에 따르면 옛 문헌 속의 休는 크게 두 갈래였다. 착하고 훌륭하고 아름다우며, 기쁘고 즐겁고 편안하다.
그렇게 休는 정말로 아름다운 글자였다. 그러니 쉼은 몸을 쉬는 것을 넘어 마음과 영혼을 쉬게 하는 편안하고 기쁜 일일 뿐 아니라 착하고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일본에서 한창인 ‘슬로 라이프’ 운동이 생각난다. 우리말로 느리게 혹은 느긋하게 살기 쯤 될까.
운동을 이끌고 있는 쓰지 신이치는 슬로 라이프를 걷기, 게으름, 놀기, 머물기, 방랑, 슬로 러브, 있는 것 찾기, 잡일, 텔레비전의 9가지 키워드로 압축했는데 ‘잡일’이란 키워드가 특히 흥미롭다. 입시나 취업용 공부가 아니면 잡학으로 치부하고 친구들과의 수다는 시간 낭비로 취급되지만 사실 인생이란 ‘잡일의 집적’ 아닌가. 
우리는 보통 무엇을 배우거나 좋아서 쫓아다닌다고 하면 대뜸 "그거 해서 나중에 뭘 할 건데"라고 묻는다. 더 심하게는, "그거 하면 밥이 나와 떡이 나와" 다그친다. 일본은 다른 것 같다. 언젠가 기차를 공부하는 소그룹을 소개한 글을 읽었는데, 이들이 모은 자료와 그간의 연구 성과는 단순히 취미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체계적이고 방대했으며 전문적이었다. 열차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객차 하나를 돌아보기 위해 한국에도 다녀갔다고 했다. 직업적으로 기차를 연구하는 연구원이나 학자가 아니었다. 그저 취미로, 기차가 너무 좋아서, 기차를 공부하는 보통사람들이었다. 그런 여유와 성실함과 느긋함이 부러웠다.
요즘 젊은이들은 조금 낫다. 여유가 있고 놀 줄 알고 '잡일'을 즐길 줄 안다. 바라건대 꽃을 좋아하면 화훼도감 하나쯤 떡 하니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몰입하고 연구(물론 즐기면서 말이다)할 만큼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온갖 경쟁과 줄서기와 조급함 속에서, 정작 이룬 것을 두고도 여기저기가 아프고 위경련이 나고 종양 덩어리가 커지고 시력이 나빠지고 원인 모를 통증이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하는, 스트레스에 취약한 부모세대와는 같지 않기를. 미래를 위해 늘 오늘의 행복을 유예하는 데 익숙한 우리 같은 '쪼다'세대와는 다르기를. 돈을 벌어야 하고 먹고살아야 한다는 핑계를 대는 데 너무나 익숙해진 비겁한 우리 세대 같지 않기를.
습기를 머금은 산, 향기가 진동을 한다. 빛은 짙어가고 속살이 깊어진다. 내 관자노리 혈관이 저절로 수그러든다. 눈이 맑다. 소요가 주는 선물. 하루가 그렇게 갔다. 느릿느릿 터벅터벅 게으르고 무료하게.
올 여름엔 아름다운 ‘휴’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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