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수목원
천리포 수목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6.1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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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 상봉동동 문화위원

“내 얼굴은 서양인이나 내 가슴은 한국인이다. 한국에 반한 한 이방인을 품어 준 은혜에 감사하여 나는 이 땅에 수목원을 조성하여 자식 돌보듯 나무를 키웠다. 내가 평생 사랑한 나의 제2조국과 동포들이 따뜻한 마음이 되어 하늘이 내린 이 아름다운 강토에 늘 푸른 산림의 옷을 입혔으면 한다” 이 말은 민병갈(1921~2002)이 남긴 말로서 본명은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이며 미국 태생으로 평소 나무를 좋아하는 광(狂)으로 1945년 한국에 진주한 선발대 장교로 인천항에 첫발을 디딘 그는 주한미군 총사령부 직원으로 근무하다 전역하고 1954년부터 한국은행에서 일했다.

1960년대 초부터 한국 이름을 사용한 그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의식주에 동화돼 김치를 먹어야 입맛이 나고 온돌에 누워야 잠이 잘 들고 한복을 즐겨 입었고 자신을 두고 내 인생은 한국인이라 표현했다. 1979년 서양인으로서는 광복 후 두 번째로 귀화해 30년만에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875번지 57ha의 토지를 매입후 7ha에 14,400여종의 나무를 심어 천리포 수목원을 30년간 식물종이 살고 있는 세계적인 수목원으로 조성했다. 1970년 태안반도 천리포에 나무를 심으며 수목원 조성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고 유럽과 미국명문 수목원과 교류하며 세계의 나무들을 수집하는 한편 한국의 토종나무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완도의 자생종 호랑가시나무를 발견 국제 공인을 받는 학술적인 업적도 남겼다. 이런 공로로 1989년 영국의 왕립원예협회로부터 세계의 식물학자와 원예인이 선망하는 비치 메달을 받았다.
한국정부는 2002년 금탑 산업훈장을 수여했고 2005년 국립수목원 “숲의 명예전당”에 흉상이 헌정했다. 30년간 수목원에 들어간 500억원은 증권투자를 통해 마련할 정도로 돈벌이의 귀재였으나 평소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평생 독신자로서 생활하였고 유창한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 독일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한 외국어 달인이라는 사실, 편지쓰기를 좋아해 통신문을 포함하면 하루 평균 10통이 넘는 편지를 썼다는 점 등은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다.
2002년도에 숨을 거두어 서울근교의 묘원에 있다가 2012년 4월에 천리포 수목원에 수목장으로 매장했다. 천리포 수목원은 산림청에 1979년도 국가에 귀속시켰고 천리포 수목원을 공익법인으로 만들어 현재 관리하고 있다. 일년에도 많은 종이 소멸되어 가고 있으며 위기식물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수목원에서는 종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수집관리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며 영구히 소장 할 수 있는 많은 종을 확보하여 수목원을 만들어 관람객에게 보여주고 학술적 자료로 이용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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