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안녕
뜨거운 안녕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6.28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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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지/SK에너지
사보편집기자
“선택한 목록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친절한 물음에 손가락을 한 번 움직여 대답하는 것으로 안녕은 성사된다. 현대인들은 정기적으로, 혹은 우발적으로 특정 인물과의 관계를 단절하려 할 때 이토록 일방적이고 무례한 이별을 단행하곤 한다. 당시에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연락해야 할 목적이 있어서, 인연이었기 때문에 저장했던 전화번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삭제해도 무방한 것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수많은 종류의 인연을 관리하는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속에 저장된 이름만으로는 언뜻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는 이들, 복잡 다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인연들을 각기 다른 폴더 속에 나열하고 한 번씩 걸러냄으로써 정리하고 있다.
과거의 우리는 인연을 기억하기 위해서 전화번호를 계속 되뇌고, 여러 번 눈에 담았다. 친목을 유지하기 위해서 직접 대면했고, 그것이 힘들면 목소리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머릿속에 기억된 전화번호를 잊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은 꽤나 길었다. 수첩에 두 줄을 그어 지워도, 그 아래에 적힌 번호는 더 선명히 눈에 들어오곤 했다. 안녕을 말했어도 이를 행하는 절차는 길고도 지난했다.
이제 안녕은 빠르고 쉬워졌다. 내내 연락하지 않던 상대에게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따위의 명절 단체 문자 한 통이라도 오지 않으면, 상대도 내가 그의 번호를 지우는 일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미 그의 전화번호부에 내 번호는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때 우리는 삭제 버튼이라는 간단하고, 흔적도 없는 절차를 통해 안녕을 고한다. 두 번 다시 방문할 일 없는 스쳐간 미용실, 병원, 배달음식점의 스팸 문자와도 수신거부라는 현명한 방법으로 영원히 안녕할 수 있다.
그러나 이토록 쉽고 일방적인 안녕들을 행해오면서도 우리는 가슴으로 하는 이별과 뜨거운 안녕의 마음을 잊지 않았다. 2010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을 기억하는가. 스페인의 미드필더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는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금지된 세리머니임을 알면서도, 가슴에 떠나간 친구의 이름을 품고 뛰었다. 이미 세상을 등진 친구를 멋지게 배웅하기 위해, 이별의 선물로 조국의 우승을 안겨주기 위해, 골을 넣고 유니폼을 벗어 가슴에 적힌 메시지를 펼쳐보였다. 세리머니의 대가로 그는 경고를 받았다. 멋지게 이별한다는 것은 때로 어떤 것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전화번호부 속에는 여전히 오랜 시간 눌러지지 않은 번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삭제 버튼 대신 통화버튼을 눌렀다. 일방적인 이별의 안녕 대신에, 재회를 약속하는 안녕을 건네기 위해. 그 대가는 수화기를 타고 흐르는 어색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별보다 썩 괜찮은 결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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