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은 경운궁 안에 있다
덕수궁은 경운궁 안에 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7.0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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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문화재 컬럼니스트

1592년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입 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리를 피해 평안도 의주로 몽진했던 조선 14대 국왕 선조가 한성으로 환도한 후 월산대군의 사저를 국왕의 시어소로 쓰면서 궁이 되었고 1608년 선조가 승하한 후 15대 국왕 광조가 이 경운궁에서 즉위하면서 궁호를 경운궁으로 명명 했다.1897년 대한국 황궁 경운궁으로 이어 한 대한국 고조 광무제는 10월 12일에 백악(북악산)의 남쪽 황단에서 천제에 고유제를 올리고 대한국 1대 고조 광무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국호를 정하여 대한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 원년을 삼는다고 천명하여 조선시대에 이어 대한시대가 시작됐다. 1895년 이토 일본 총리의 명령을 받은 일본군에 살해된 왕후 민씨를 대한국 명성황후로 추책하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했으며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황태자 순희 융희제가 황제에게 축하 인사를 올리는 진치사의,문무백관들이 황제에게 축하를 올리는 하표의를 비로소 거행했고 역대의 고사를 상고해 특별히 대사령을 행했다.

대한국 고조 광무제는 종묘를 태묘로, 사직의 신위판을 태사와 태직으로 격상하여 개칭했으나 일본 제국주의 통감이 정미늑약 불법 늑결,대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킨 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이유로 대한국 고조 광무제를 부정하며 황태자에게 조선 왕궁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명령하고 대한국 황궁 경운궁을 조선시대에 상왕의 궁에 승하시까지 한시적으로 사용한 일반 궁호로 격하시켰다. 1905년 11월 18일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탈하는 을사늑약의 불법 늑결로 1906년 일제의 통감통치가 시작된 후 1907년 일제 통감부에 의해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조 광무제가 황태자(2대 황제 순종 융희제)에게 조선국 왕궁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명령한 뒤 영국인이 공사 감독한 서양식 근대건축물 덕수궁에 임어하였다.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한 후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편전 겸 침전으로 사용된 서양식 근대건축물 덕수궁은 대한제국 황실 궁내부가 1900년 착공하고 1909년 완공해 1919년 1월 붕어시까지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전각으로 사용하했다.
완벽한 좌우 대칭의 덕수궁은 고전주의 양식을 채택했으며 이오니아식 기둥이 상부를 떠받치고 있다. 정미늑약 불법 늑결,대한국 군대 강제 해산 후 황태자의 대리청정은 일본 통감의 강박에 의한 것이며 대한국 황제 고조 광무제는 대한국 황궁 경운궁에 1919년 붕어시까지 임어하였고 황태자와 친일 내각(작위,은사금)이 조선 왕궁 창덕궁으로 옮겨 간 것이며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강탈당한 나라도 대한국이고 1945년 일본(日本)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한 나라도 대한국이므로 대한국 황궁 경운궁 궁호의 환원은 완전한 대한 광복을 위한 역사적 당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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