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혁명당(人民革命黨)과 소크라테스
인민혁명당(人民革命黨)과 소크라테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9.19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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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판/전 고교교사·서울대성학원장
 
     
 

요즘 사회전반에 회자되어 소피스트적 논박을 벌이고 있는 인혁당 사건이란 1964년 당시 중앙정보부가 소위 진보계 인사와 언론인·교수·학생 등이 ‘인민혁명당’을 결성하여 국가전복을 도모한 사건으로 2007년 법원의 재심으로 무죄판결이 나기까지 40여년간 조작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을 빚은 공안사건이다.

1965년 1월 서울지방법원 선고공판에서 도예종(징역)·양춘우(징역)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5월 서울고등법원 형사부는 원심을 파기하고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선고를 내리며 도예종·양춘우 외에도 박현채를 비롯한 5명에게 징역 1년, 나머지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한다.
그동안 인혁당 사건은 3번의 판결이 있었다. 1차(1964), 2차(1975) 그리고 2007년에 각각 한 번씩, '64년과 '75년은 당시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를 선고했다. 2007년 서울 중앙지법에은 '75년 선고에 대한 재심에서 ‘고문에 의한 범죄는 유죄가 될 수 없다’는 근거를 내세워 무죄로 판결한다. 그렇다고 그들의 간첩행위까지 정당성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도예종은 1948년 남로당에서 활동하다 1960년 민민청 경북 간사장을 지냈으며 1964년 7월 북한간첩 김배영, 김규칠 등과 인혁당을 조직, 지하활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형(刑)을 산다. 도씨는 인혁당 사건후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다시 당국에 체포되어 이듬해 사형됐다. 그 외 민청학련 사건과 남민전 사건에도 관여한다.
야당과 소위 진보세력은 인혁당 사건을 조작이라 하지만 1차 사건에 참여한 박범진 전 민주당 국회의원은 “인혁당 사건은 실재한 사건이나 정부가 객관화하는 데 실패해서 조작사건처럼 논란이 됐다”며 “1963년 입당시 문서로 된 당의 강령과 규약을 직접 봤고 오른손을 들고 입당선서도 했다”고 증언했다.
좌익운동가로 활동했던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도 6・70년대 주요 시국사건으로 꼽히는 1차 인혁당 사건, 통혁당 사건, 남민전 사건 등은 정부의 용공조작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공산혁명운동 이라고 주장했다. 직접 가담했던 박범진 의원이나 안병직 교수의 증언대로 자생적인 공산혁명조직이었음을 재확인하고 있다.
제2차 인혁당 사건은 서도원, 도예종, 이재문 등 제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 및 잔존세력들이 출소, 당을 재건하고 학원가에 침투 각종 시위를 배후 조종하다 1974년 공안당국에 적발된 사건이다. 인혁당 재건위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인혁당을 재건, 민청학련의 시위를 선동해 정부를 전복한 후 노농(勞農) 정권을 세운다는 것을 목표로 한 사건이다.
제2차 인혁당 사건은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설립된 국가정보원의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가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의 지침에 따라 조작된 것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관련자 16명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한다.
이러한 사법부의 시대성(냉전)과 특수성(남북대립)을 간과한 대법원의 뒤집기 판결은 극도의 이분법적 혼란을 가져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포용과 준법, 절제와 질서, 확고한 국가관 정립이 우선 되어야만 한다. 이들이 무시되고 무너진다면 동서고금의 많은 국가들처럼 흥망성쇠의 한 축을 우리시대에 맞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는가? 이는 법에 의한 통치를 의미하며 법치는 질서 유지와 법적 집행의 강제성을 정당화시켜준다는 뜻이다. 만약 실정법의 적법성을 불신하게 된다면 법치주의는 물론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한다는 역사적 진리를 암시하는 준엄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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