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적 권력으로서의 ‘문화’
상징적 권력으로서의 ‘문화’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10.1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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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창원고 교사

 
유쾌한 소식이 드문 요즘, 대세남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가수 개인에게도 행운이겠거니와,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긍심도 한껏 높여준 듯하다. 한편에서는 문화 경제적 가치의 계산에 몰두하는 것을 보니, 우리 대중문화의 세계화에 한몫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싸이는 국민들의 성원에 감사한다는 겸손한 마음을 담아 9월 4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무료 콘서트을 열었다. 그날 보여준 8만 군중들의 떼창과 떼춤은 가히 장관이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세계적인 성악가 조수미와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지휘자인 장한나의 공연을 접했을 때 느끼던 경외심이나 부러움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유튜브로 전해지는 현란한 음악과 군중들의 몸짓들이 그냥 주체할 수 없는 피 끓는 젊음의 아우성처럼 들렸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러한 생각들이 단지 내 개인의 취향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다. 이어서 일전에 읽어 두었던 공진성의 ‘폭력’에서 문화권력이 오버랩되어 떠 올랐다. 이 책에서는 타자에게 고통을 수반하는 폭력의 부당함과 함께 우리는 왜 폭력을 동반한 생명체일 수밖에 없는지, 국가는 어떻게 합법적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행되는 상징적(문화) 폭력은 어떻게 사회 구조적으로 재생산되는지, 미래사회에는 어떤 형태로 폭력이 변화되어 나갈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전하는 상징적 권력으로서의 문화 폭력이 행사되는 방식에 대해 적잖이 놀랐다. 사람들은 자신과 타자를 구별 짓는 특정한 문화적 행위를 통하여 그들보다 내가 지적,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사실을 과시하려 한다. 자신의 문화 기호와 소비 방식을 통해 인위적인 차별성을 형성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현상은 점차 독특한 개성과 함께 자본과 사회적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마침내 그 문화를 이해할 수 없는 타자에게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폭력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공진성은 상징적 권력의 작동 방식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상징적 권력은 지식을 비롯한 각종 문화적 요소들을 통해서 작동한다. 마치 비물질적이고 비경제적이며 비정치적인 것 같은 요소들을 통해서 상징적 권력이 작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속에서 지배가 관철되고 있음을,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재생산되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들의 문화적 욕망이 그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음을 모르는 채 더 열심히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 문화를 소비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부르디외는 문화적 취향을 계급적 지배의 결과물임과 동시에 계급 지배의 핵심 매개물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조수미가의 이태리 가곡, 장한나가 들려주는 모차르트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듣고 예술적 미학을 즐기려는 필자의 행위는 권력을 갖기 위한 무의식적 욕망의 발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10여년 동안 책을 매개로 하여 학생, 학부모와 함께 독서 관련 문화 활동을 해왔다. 위대한 철학자, 문학가,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통해 느낀 자신의 사유를 타인과 교감하고, 예술 공연을 함께 관람하고, 책과 연계한 역사문화기행을 열정적으로 즐겼다. 이 활동들은 그야말로 물질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순수하리라는 믿음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지적 문화 활동들이 상징적인 권력을 형성하고 문화적 폭력성을 가질 수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혼란스러웠다.
얼마 전 ‘예수전’과 ‘B급좌파’의 작가인 김규항의 강연 중에 ‘이웃의 눈물을 외면하고 사유하는 자 세련된 탐욕자’라는 말이 내 가슴에 찌꺼기처럼 남아있는 이유를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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