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자와 남는 자
떠나는 자와 남는 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1.10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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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숙/시인

“돛의 무게를 이기는 배라야 항해를 할 수 있다”는 사르트르의 그 충고가 고최진실 집안을 덮친 연이은 저 비극 속에서 처절히 들려온다.

어렸을 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빨리 20대가 되고 빨리 어른이 되면 좋겠다”고 말하면 부모님이나 어르신들이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들 말씀했다. 그 어른이 되는데 천 번을 흔들려야했다면 부부가 되는 데는 적어도 만 번을 흔들려야 부부가 된다고 본다.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고 그 흔들림이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부부가 부모가 되려면 거기서 십만 번, 백만 번, 아니 수천만 번은 더 흔들려야 한다.
한 생명이, 한 신부가 그렇게 탄생하였고 한 자녀가, 한 신랑이 또한 그렇게 태어났던 것이다. 미당의 '국화 옆에서'가 절창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화 한송이를 피우는데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야 했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어야 했다면 한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고 남의 배우자가 되고 아이들의 부모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오랜 시간과 얼마나 많은 삼라만상의 눈물이 필요로 했을 것인가?

남남으로 살다가 어느 날 서로 부부로 만나면 그때부터는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는 맞바람에 맞서게 되어있다. 그러면 흔들리는 돛의 그 무게를 잘 조절하면서 목적지를 향해 순항해가는 배가 있는가 하면 그 바람, 그 돛의 무게를 못 이겨 전복되고 마는 난파선도 있다. 고 최진실씨와 고 조성민씨가 항해사로 키를 잡고 나선 배가 바로 이 후자인 것 같다.
이들은 왜 그랬을까? 그 예쁜 얼굴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어린 그 아이들을 둘이나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그 독한 마음을 어떻게 먹을 수가 있었을까? 그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다. 얼마나 잘생긴 인물이고 한때 얼마나 잘나갔던 영웅인데, 한창 즐거울 남자 나이 40대에 엄마도 없는 불쌍한 어린 남매만 남겨두고 어찌 자기 손으로 자기 눈을 감기는 잔인한 그런 길을 선택한단 말인가?
그래서, 선현들이 일찍이 “통즉불통(通則不痛)이요 불통즉통(不通則痛)이라”고 했던가. 이는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말이다. 이는 몸에도 마음에도 마찬가지다. 몸도 전신에 기와 혈이 잘 통해야 안 아프고 부부 간에도 서로의 마음이 잘 통해야 결혼식장에서의 약속을 일생토록 성실히 이행할 수가 있는 법이다. 만사가 다 그렇다.

헌데, 앞으로 앞날이 더욱 걱정이다. “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 이 이야기 듣는가?”어린 저 남매는 장차 국어시간에 김소월의 이 '부모'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나이 50이 넘어도 치매 중인 80대 노모는 당신 딸인 줄을 잘 몰라봐도 엄마와 마주하면 “엄마!”라고 부를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데.
그런데 이런 아픔 속에 비극의 가족사를 써야하는 가정이 이집만이 아니라서 문제다. 물론 최진실 최진영 조성민씨 경우는 쌍용자동차 해고로 인해 자살을 택한 노동자들과 이번 현대차 노조원의 그 경우와는 죽음을 택한 동기와 과정이 아주 다르다. 하지만 서로가 통하지 않아서 아프다 못해 임계점에 이르러 생명의 끈을 스스로 끊어버린 점은 다 같다.

지난여름 런던올림픽에서 4위를 해 온 국민이 마냥 기뻐할 때만해도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자살률 1위라는 이 사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앞둔 이 시점에서 국민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잃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 어쩌면 사람이 먼저다는 상대 후보의 외침도 참고하라는 하늘의 소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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