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약속
20년 전 약속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1.24 15:4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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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숙/시인

“ 저, 이번에 결혼 합니다. (전)도사님, 그때 저랑 한 그 약속 기억 하시죠!”

갑자기 날아온 이메일 청첩장, 헉! 신랑신부가 둘 다 제자라. 거기다 뜬금없이 신랑이 20년 전에 약속까지 들이대니 순간 얼떨떨해졌다.
그때 그는 “ 그런데 결혼식 장소가 교회라서 도사님의 주례사를 못 듣게 되어 정말 아쉽습니다...... 하지만 그날 꼭 오실거죠! ”라며 즉석에서 면죄부도 함께 발행해 주었다.
통화를 끝내니 시간이 20년 전으로 되돌아 갔다. 어느새 서른다섯 살이 된 이 아이를 처음 만난 때가 까까머리 중학생. 그가 직접 만들어준 커다란 선물보따리를 둘러멘 산타클로스 카드가 아직도 내 수첩에 있다. 그날 그는 제 품에서 이 카드를 꺼내주며 제가 어른이 되면 자기 결혼식 주례를 꼭 내가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때 자기 집을 3층으로 올릴 것이니 거기서 자기네 가족과 함께 살면서 자기 아이들도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
한편의 명화로도 손색없는 이 그림 같은 장면을 흘러간 세월과 함께 까맣게 잊고 있었던 터라 나는 예정된 일정을 바꿔가며 이 결혼식에 가야했다. 신랑신부 측에 두 곳 다 축하 인사를 해야 했으니 봉투가 얇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거기다 축시 한편을 지어 얹었다.
<명준이와 수지> 축복 받는 이 / 결혼! 어찌 / 혼주와 신랑신부 만의 기쁨이리요 // 신랑으로 만들어줘서 고맙습니다. / 낭자여 ! 나의 갈비뼈여! / 서로 사랑하라. 죽기까지! 주신 그 / 명령 받들며, 자랑스러운 아들로, 아빠로 / 준비된 남편의 길 가겠습니다 // 신부로 맞아줘서 영광입니다. 당신 / 부인으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되겠습니다. / 신망애- 믿음. 소망. 사랑으로 / 수놓으면서. 비록 서툴어 / 지금은 비약하나 그 나중은 심히 창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토요일인데도 남편이 출근을 하는 바람에 시외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집에서 터미널까지 택시를 타야할 정도로 버스시간에 맞추다보니 시를 두 번 읽거나 붓글씨로 다시 쓸 시간도 없었다.
땅 위에 서면도 20년 전과 달랐지만 지하의 서면은 완전 딴 세상이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그 변화는 사상도 마찬가지라 지하철 표 한 장 바로 끊기도 쉽지 않았다. 옛날 생각이 절로 났다. 그리운 숱한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20년 전 제자가 시집장가를 가는 마당이니 대학 동기라도 빠른 이들은 이제 엄마 아빠를 넘어 할머니 할아버지 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사상역에서 뒤로 줄을 섰다가 염치불고하고 옆줄 앞에 선 처음 본 청년에게 1,200원을 건너며 전철표를 부탁했다. 덕분에 결혼식장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축시라도 식순에 없는 순서를 끼워넣는 것은 예가 아니지만 주례자께서 우리의 관계를 고려해 기꺼이 배려를 해주셨다. 신랑신부는 결혼식을 하다가 깜짝 놀라야 했다. 청첩장을 받았을 때 내가 놀란 그 이상으로.
이 험한 세상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라 참 좋은 자리에 초대해준 아이들이 너무 고마웠다. 저들 앞에 다시 서기에 50대의 내 모습이 너무 작고 초라했지만. 그래도 제발, 올해에는 이런 아이들 이런 자리가 더욱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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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메이트 2013-01-28 13:26:57
잘읽고 갑니다. 도사님~~
도사님 축시처럼 그렇게 살도록 할게요. 저에게는 언제나 도사님이신거 아시죠~
다시한번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