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빙의 스케치북
어빙의 스케치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2.21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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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진/수필문우회 회장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1783~1859)은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해 온 상인 집안의 11번째 아들로 뉴욕 맨하튼에서 태어났다. 그때는 바로 미국이 독립한 해였는데, 뉴욕은 인구가 만 2000명밖에 안 되고 유럽을 오가는 화물선이 주로 정박하는 조그만 항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자라는 동안 인구가 서서히 불어나긴 했지만 학교다운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10대부터 법률사무소에 다니며 일을 배웠다. 1804년 21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서 2년간 실무를 익히고 돌아와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러나 그는 법률보다는 줄곧 문학 쪽에 더 열의를 가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글을 써오다가, 1809년 뉴욕의 역사란 책을 발간하면서 작가생활로 완전히 전환했다.

1815년에 어빙은 다시 영국으로 가서 그곳 문인들과 교우를 하며 문필활동을 했다. 영국은 당시 낭만주의 문학의 전성기였다. 워즈워드, 콜리지, 스콧 같은 시인들이 활동했고 램이 수필을 쓰고 있었다. 어빙은 1819년에서 1820년에 걸쳐 미국과 영국 두 곳에서 ‘스케치북’이라는 최초의 작품집을 간행했다. 전기 등 꾸준히 많은 방면의 글들을 발표했지만, 지금까지 불후의 고전으로 널리 사랑을 받는 책은 역시 스케치북이다.
어빙은 그가 26세 때 약혼자 마틸다 호프만(Matilda Hoffman)이 17세로 사망을 하자,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결혼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면서 가정주부나 아이들에 대한 묘사는 자상하고 정확하다.

스케치북 가운데 나오는 ‘아내’라는 작품은 참으로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본 어떤 집의 한 사랑스러운 아내에 대한 거침없는 찬가이다. 또 상심(The broken heart)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된 순수하고 가련한 한 여인이 주위 사람들의 어떠한 사랑의 공세에도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결국 상심의 희생물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여인들에 대한 찬미의 글은 어빙 자신이 누려보지 못한 사랑하는 여인과의 행복한 삶에 대한 아쉬움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립 반 윙클에는 언제나 거친 잔소리를 입에 달고 있는 매서운 아내와 그 위세에 눌려 못난 행동거지를 일삼고 있는 공처가를 풍자하는 박진감 넘치는 묘사도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립 반 윙클이 카츠킬 산맥의 한 봉우리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이상한 복장을 한 작은 사람들을 만나 술을 얻어 마시고 잠이 들어 20년이란 세월을 그 단 하루 밤의 잠으로 공허하게 보냈다는 설정이다. 그러한 설정의 도입을 단순한 망상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지역 또는 네덜란드에 전해오는 전설을 읽는 이의 머리 속에 은근히 환기시키는 소도구들을 등장시켰다.

립 반 윙클에서 주인공이 산속에서 일어난 기적으로 얻은 것은 성가신 아내의 압제에서 벗어났다는 자유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쓸쓸하고 서글프고 맥이 빠지는 자유였다.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도 어쩐지 따뜻함보다는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어빙이 이 이야기를 통해 강조하고 싶어 한 것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아무리 고약하더라도 한 사람의 아내가 있는 가정이 훨씬 더 좋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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