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경제관
불교의 경제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3.05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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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산스님/금인산 여래암 주지

 
꽃샘추위가 발악을 해도 봄은 왔다. 모두 가슴을 펴라. 꽃샘추위에 반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말도 있지만 겁내지 말고 천천히 성공을 향해 전진해야한다. “봄철의 숲 속에서 솟아나는 힘은 인간에게 도덕상의 악(惡)과 선(善)에 대하여 어떠한 현자(賢者)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타성에 젖어 하루하루 똑같이 생활하다보면 급격한 변화에 적응을 못하고 낙오되기 쉽다. 언제나 정신적 풍요와 심신의 건강과 자유 속에 자기운명의 결정자가 되어야한다. 잘 풀려나가는 유연한 모습과 매끄럽게 일하는 자신을 영상해보라. 확신 속에 일하고 확신을 갖고 뛰어야만 행복하고 기쁜 나날로 이어진다. 열심히 일해 얻은 소득으로 신나게 놀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소비의 참된 즐거움도 맛본다. 불교의 경제관은 기술혁신에 의한 생산성 제고와 이윤추구로서 많이 벌어서 잘 관리하고 좋은 곳에 잘 쓰라는 것이다.

불교는 무조건 개발과 성장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끝없는 이기적 욕망에 바탕을 둔 작금의 팽창주의나 무한생산체제를 용인하지 않는 것뿐이다. 물질에 대한 소유 적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돈을 벌되 바르게 벌어 바르게 관리하고 바르게 쓰라는 것이다.

그림의 떡으로는 주린 배를 채울 수 없고, 돈 없는 건강은 반병(半病)이기에 생활의 안정 없이는 마음의 평화조차도 잃어버리니 많이 벌라는 것이다. 소득이 적으면 불건전한 사고가 유발된다. 직장에서도 언제든지 해고할여면 해보라는 반항적 사고가 생긴다. 직무도 적당히 하게 되고 경영자에게 손해를 끼치려는 반발심이 생기며, 공금횡령, 물품절취 등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부업거리를 찾아 끼웃거리며 직장을 상대로 모함, 강도, 방화는 물론 극도의 악의를 품는 날이면 경영자내지 그 가족에게 해를 가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이 벌어야한다.

가진 자들은 부족한자에게 협조하고 동반자가 되어주라. 다 같이 살자. 불교는 무한경쟁, 승자독식, 불공정경쟁과 분배, 환경파괴, 이러한 병폐를 개선하여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기위해 탐욕을 절제하고 미래를 위해 보시공덕을 저축하라 가르친다. 연꽃은 진흙 속에 뿌리박고 피어난다. 진흙탕 같은 이 세상이 연꽃을 피워낼 좋은 터전이다. 불법은 세상 밖의 가르침이 아니다. 처렴상정(處染常淨), 물든 세속에 살면서도 맑고 깨끗하게 살라는 것이다.
연꽃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듯이 수행자는 세상 속에 살아도 세속에 물들지 말아야한다.

현명한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찬물에 식은 밥 한 덩어리 말아 먹고도 만족할 줄 안다.
속물에게는 지혜도, 통찰력도, 판단력도 없다. 진리에 눈을 뜨는 순간 모든 번뇌 망상은 용광로에 떨어지는 눈처럼 녹아 없어진다. 단, 3일만이라도 눈을 뜰 수만 있다면 하고 절규하든 헬렌켈러에 비유하면 오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3중고의 그를 생각해본다면 싱싱한 육체와 잘 보이는 눈, 잘 들리는 귀, 잘 작동하는 입에 감사할 수 있다.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불행을 역전의 기회로 활용한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힘을 얻어 불굴의정신력으로 성공한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한다. 나 이대로 좋은가. 더 더욱 발전할 수는 없는가. 깊은 생각에 잠겨보아야 한다.

이만큼 똑똑하고 잘났다며 으스대고 날뛴 인생은 오리지널이아니라 오줌싸개 수준이다.
자신을 참다운 관점에서 보게 되면 반듯하게 전진해 나갈 수 있다. 잘못된 판단은 공포를 낳고 자신을 반대쪽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탐욕의 불꽃이 멈추지 않으면 위험하다.

더 많은 것을 탐할 때 갖가지 권모술수와 암투가 난무하는 살벌한 싸움터로 뛰어들게 된다. 그러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고 항상 조마조마한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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