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 실학사상(實學思想)
중국 근대 실학사상(實學思想)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3.3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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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한국국제대 석좌교수/지리산막걸리학교 교장

청대는 그동안 위·진 시대에서 수·당을 거쳐 송·명까지 이르는 지리한 심학(心學)과 도학(道學)에 대한 반동으로 실학(實學)과 고증학(考證學)이 대두되면서 송학(宋學)에서 한학(漢學)으로 방향을 전환한 시대였다.

명말의 부질없는 성명(性命)의 토론은 꼬리를 물고 서로의 구설(口舌)이 높아가는, 위·진 청담(淸談)의 재판 속에서 국가민족은 돌보지 않고 600년의 이학(理學)이 남겨준 병근은 건강을 침해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라를 구하고 시폐를 교정해 원시 유가의 본래 정신을 회복하는 일차적인 사업으로 모두 고증에 나서고 실학으로 경세(經世)를 제창했다. 말하자면 공허에서 실제로, 정(靜)에서 동(動)으로 그 거보를 내디뎠다.
그러나 만청(滿淸)의 고압(高壓) 정권 때문에 그 움은 자라지 못하고, 기껏해야 중고의 정리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고증(考證)에 머물렀고 사상은 활력을 잃은 채 침묵이 길었다.

그 중 청대 실학의 기초를 닦은 고염무(顧炎武)·안원(顔元)·황종의(黃宗義)·왕부지(王夫之)와 고증에 힘쓴 대진(戴震) 등 다섯을 그들의 실용과 고증을 위한 반송(反宋) 철학의 요점을 연대순으로 살피기로 한다.
黃宗義(黎州.1610~1695) : 공리공담(空理空談)을 증오하고 어록(語錄)을 전용하는 이학(理學)을 반대한 나머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입장에서 수신치세의 실학을 주장했다. 그는 치학(治學)에 먼저 유가의 경서를, 그리고 사서(史書)를 읽도록 권장했다.

그는 철학자로서의 공적보다는 사학자로 그 지위가 높으며, 그보다는 민생민복(民生民福)과 민본민권(民本民權) 사상을 고취하여 배만(排滿)의 풍조를 일으킨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같은 정치철학서의 저자로 유명하다.
顧炎武(亭林, 1613~1682) : 정림은 이학(理學)을 파기함으로써 명말의 퇴풍을 바로잡고, 경학의 기초를 단단히 함으로써 청대의 고증풍조를 계발했다. 하늘은 선(善)한 사람을 많이 두고 악한 사람을 적게 두었다는 성선악설(性善惡說)을 전제하면서, 인간의 수업은 효·제·충·신이나 그보다 더 작고 구체적인 쇄소응대진퇴(灑掃應對進退) 같은 기본적인 예절에서 비롯된다고 그는 강조했다.

학문을 위해 그는 모든 문장에 박학할 것과 행동함에는 부끄러움을 지닐 것을 그 종지로 삼았으니, 사상과 이론의 의리(義理)로부터 민생을 위한 경제로, 공담(空談)을 실학(實學)으로 전향한 선구자적 공로를 남겼다.

王夫之(船山, 1619~1693) : 당시의 양명(陽明)학이 공소(空疎)함을 배격하면서 장횡거(張橫渠)와 주자(朱子)와 정명도(程明道)를 추존하면서 청대 학자가 거의 고전의 고증이나 훈고에 급급함에 비교적 깊고 원숙한 사상을 제창했었다. 형이상을 도(道)라 하고, 형이하를 기(器)라 하는 전통사상을 반대한 나머지 선산은 비록 주자를 숭상하지만 주자가 이(理)를 도로, 기(氣)를 기(器)로 풀이함에 동조하지 않고, 반대로 기(器)를 위주로 하고 도(道) 부수로 보는 ‘기이재도설(器以載道設)’과 또한 체(體)가 위주되고 용(用)은 그 보좌에 불과하다는 일반의 명체달용(明體達用)설을 뒤엎고, 용이 체보다 중요하다는 ‘용이현체(用以顯體)설’, 즉 용중어체(用重於體)설을 주장했으니, ‘기이재도설’과 함께 모두 이가 우선이요, 기가 후차란 종래의 전통사상을 거부한 것이다.

이 밖에 그의 ‘심물동일(心物同一)론’은 중국에서 최초의 학설이라고 하는바 ‘마음은 만물이요, 만물은 마음’이라고 짧게 제시했다.

顔元(習齋, 1635~1704) : 송·명(宋明)의 유심철학에서 다시 청의 고증학풍으로 전입된 그런 환경 속에 습재(習齋)만큼 한(漢)유의 훈고, 위·진의 현론, 불가의 허무, 송·명의 이학에 대해 통렬한 비판과 공격을 가한 사람도 없다. 특히 개인적으로 동중서(董仲舒), 정·주(程朱) 등에 대한 반격이 심했다. 비천한 계급 출신인 그는 학력(學力)과 실천을 주장하면서, 학문에 대하여 거의 묵자에 가까울 정도의 고행(苦行) 정신으로 임했다. 그는 흡사 반대를 위한 반대 같지만, 심성(心性)과 도(道)를 옹호하기 위한 일련의 반대였다.

실행과 실용을 위해 학습의 무용까지 주장한 것은 이학(理學)의 공손함을 배격하기 위해서였고, “세상에 씨를 뿌리면서도 수확을 기대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고, 그물과 낚시를 짊고도 물고기를 잡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공리를 주장함은 동중서의 동기론(動機論)을 반대하기 위함이요, 이 밖에 ‘이기합일(理氣合一)론’이나 ‘성형합일(性形合一)론’은 모두 주자의 이기이원론과 성형이원론을 반박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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