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의 불행
슈만의 불행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4.16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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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진/수필문우회 회장

19세기에 들어와서 귀족계급이 상대적으로 몰락하고 부르주아 계층이 음악의 주 소비자로 부상하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음악을 하려는 사람이 일반 서민에서도 나왔고, 이들을 유료로 가르치는 교사들도 나왔다. 음악이 연주되는 장소도 많은 사람들이 입장할 수 있는 공공회관이 되었고, 작은 규모로는 동호인이 함께 모여서 즐길 수 있는 부유한 집 살롱이나 안뜰이 되었다.

연주회를 성공시키는 데는 어떤 기능을 가진 음악인이 청중을 동원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에 따라 음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서열이 생겼다. 작은 음악회에서는 독주 악기의 명 연주자가 중요하지만, 큰 음악회에서는 지휘자가 훨씬 더 존중 받는다. 19세기 전반만 해도 저작권이 확고하게 정립되기 전이라, 작곡으로 생계를 꾸려 갈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아주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은 1810년에 작센 주 츠비카우에서 출생했다. 음악가가 아닌 출판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음악과 문학을 좋아하는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음악에 높은 관심과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알려졌으나, 조숙한 천재는 아니었다. 1826년 부친이 작고하면서 다섯째 막내인 그에게 자립에 필요한 자금을 별도로 남겼다.

1828년 김나지움을 졸업하자 그는 모친의 희망에 따라 안정적인 직업인이 되기 위해 법학대학에 진학했지만 음악을 하고 싶다는 오랜 욕구를 잠재울 수가 없었다.

그는 1830년 법적으로 후견인의 간섭을 벗어날 수 있는 성인이 되자,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음악을 하기엔 늦은 나이인 20세에 라이프치히로 가서 피아노교사 프리드리히 피크의 집에 머물며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정작 슈만은 1832년 오른손 약지를 다쳐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가 음악을 계속하자면 작곡가가 되거나, 지휘자나, 지도교사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는 정식으로 작곡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작곡에 열중했다. 슈만은 1840년에 9년 연하인 스승의 딸 클라라와 결혼을 하면서 많은 가곡을 작곡했고, 그 다음해는 교향곡 제1번 ‘봄’등을 내놓았다. 그러나 슈만은 그녀에게 음악인으로 늘 뒤지고 있다는 열등감을 평생 불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850년에는 그가 그렇게 열망했던 지휘자 자리에 뒤셀도르프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의 초청으로 취임했으나 그 지위를 3년밖에 유지 못해 지휘자로서도 실패를 했다.
1853년 그는 ‘새로운 길’이란 논설로, 브람스의 등장을 환영했지만, 그의 음악에서도 정신적으로 많은 압박을 받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슈만은 결국 정신병으로 1854년 라인강에 투신을 했다가 구조되어 엔데니히 정신병원에서 1856년 운명했지만, 그가 느낀 불행하고는 달리 베토벤, 슈베르트를 잇는 위대한 음악가들 그룹에 그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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