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진/수필문우회 회장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4년간에 걸친 인류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인명과 물자를 소모하고 나서야 전쟁을 그쳤다. 세계 각국은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면서 극심한 혼돈상태에 빠졌다.
엘리엇(1888~1965년)은 1922년에 자기가 주필이 되어 창간한 계간지 크리테리온(The Criterion) 제1호에 433행으로 된 시 ‘황무지(The Waste Land)’를 발표했다. 무척 난해한 시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가 그들이 겪고 있는 전후의 절망적 상황과 정신적 황폐를 읊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별로 주목하지 않고 간과했다. 1932년에 리비스가 ‘영시(英詩)에 있어서의 새로운 방향’이란 책을 통해 이 시가 지닌 혁신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제야 비로소 사람들이 이 시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고, 영국의 현대시는 이 시로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고 보는 평자들이 많다.
황무지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의 정신풍토를 빗댄 말이다. 그 풍토에 오래된 정신적인 전통이 존속해 왔다는 것을 암시하듯이, 작품 ‘황무지’ 속에는 그리스 로마 고전시는 물론 영국의 형이상학시와 프랑스의 상징시 등 다양한 시들이 인유(引喩 allusion) 되어 있다. 그 작품은 과거와의 대비를 통해 현대인의 오욕과 권태 그리고 영혼의 고갈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그러한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제시하려고 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Memory and desire, stirring)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Dull roots with spring rain) /겨울은 우리에게 따뜻했다(Winter kept us warm, covering) /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 마른 구근으로 작은 생명 을 길러 준다(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맨 처음 1행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은 초서(Chaucer)의 ‘캔터베리 이야기’서장 제1행을 인유한 것이다. ‘4월’과 ‘즐거운(sweet)’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황무지’의 제1행으로 인유한 것은 초서가 영어로 시를 쓴 최초의 중요 시인이라는 영문학에서의 상징적인 의미도 분명히 염두에 둔 처사이다. 같은 4월을 초서는 ‘sweet’ 하다고 하고 엘리엇은 ‘cruel’ 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황무지’ 1장의 5행을 보면 ‘우리(us)’라는 말이 나온다. 시인 자신이 대지와 연대하여 ‘우리’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망각의 눈에 덮인 채 한겨울을 넘겼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 대지는 세계대전을 겪은 황폐한 땅이다. 그 토양에는 새로운 삶과 성장을 가져다 줄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고, 믿음도 가지 않는다. 그러한 대지에 비를 뿌리는 4월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 달이 된다.
그러나 시 ‘황무지’는 교향악과 같다. 2장 3장을 지나서 5장이 끝날 때까지 읽다 보면 반복해서 제기되는 모티브가 우리에게 죽음과 재생은 하나의 순환을 이루어 되풀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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