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가장 잔인한 달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4.28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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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진/수필문우회 회장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4년간에 걸친 인류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인명과 물자를 소모하고 나서야 전쟁을 그쳤다. 세계 각국은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면서 극심한 혼돈상태에 빠졌다.


엘리엇(1888~1965년)은 1922년에 자기가 주필이 되어 창간한 계간지 크리테리온(The Criterion) 제1호에 433행으로 된 시 ‘황무지(The Waste Land)’를 발표했다. 무척 난해한 시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가 그들이 겪고 있는 전후의 절망적 상황과 정신적 황폐를 읊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별로 주목하지 않고 간과했다. 1932년에 리비스가 ‘영시(英詩)에 있어서의 새로운 방향’이란 책을 통해 이 시가 지닌 혁신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제야 비로소 사람들이 이 시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고, 영국의 현대시는 이 시로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고 보는 평자들이 많다.

황무지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의 정신풍토를 빗댄 말이다. 그 풍토에 오래된 정신적인 전통이 존속해 왔다는 것을 암시하듯이, 작품 ‘황무지’ 속에는 그리스 로마 고전시는 물론 영국의 형이상학시와 프랑스의 상징시 등 다양한 시들이 인유(引喩 allusion) 되어 있다. 그 작품은 과거와의 대비를 통해 현대인의 오욕과 권태 그리고 영혼의 고갈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그러한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제시하려고 했다.

엘리엇이 사용한 인유의 기법은 다양한 효과를 유발한다. 시의 일상적인 소재에 상징적인 무게를 더해주고, 독자의 마음속에 자유로운 연상을 환기한다. 그가 실제로 어떤 인유들을 했는지, ‘황무지’ 1장의 처음 7행을 잠시 살펴 보기로 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Memory and desire, stirring)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Dull roots with spring rain) /겨울은 우리에게 따뜻했다(Winter kept us warm, covering) /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 마른 구근으로 작은 생명 을 길러 준다(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맨 처음 1행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은 초서(Chaucer)의 ‘캔터베리 이야기’서장 제1행을 인유한 것이다. ‘4월’과 ‘즐거운(sweet)’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황무지’의 제1행으로 인유한 것은 초서가 영어로 시를 쓴 최초의 중요 시인이라는 영문학에서의 상징적인 의미도 분명히 염두에 둔 처사이다. 같은 4월을 초서는 ‘sweet’ 하다고 하고 엘리엇은 ‘cruel’ 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황무지’ 1장의 5행을 보면 ‘우리(us)’라는 말이 나온다. 시인 자신이 대지와 연대하여 ‘우리’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망각의 눈에 덮인 채 한겨울을 넘겼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 대지는 세계대전을 겪은 황폐한 땅이다. 그 토양에는 새로운 삶과 성장을 가져다 줄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고, 믿음도 가지 않는다. 그러한 대지에 비를 뿌리는 4월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 달이 된다.

그러나 시 ‘황무지’는 교향악과 같다. 2장 3장을 지나서 5장이 끝날 때까지 읽다 보면 반복해서 제기되는 모티브가 우리에게 죽음과 재생은 하나의 순환을 이루어 되풀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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