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아버지 홈암 나철
독립운동의 아버지 홈암 나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5.09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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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곤/밀양동명고 교사ㆍ경남국학원 이사

전남 벌교가 고향인 홍암 나철의 어릴 적 이름은 두영(斗永),뒤에 인영이었으나 단국교를 중광한 뒤에는 철(喆)로 불렀고, 그때의 도호는 홍암(弘巖)이다. 1891년에 등과 하였으나 2년간의 관직생활에서 물러나, 1904년 상경하여 기울어 가는 국권회복을 위해 ‘국채상환운동’과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고, 애국계몽단체에도 가입했다.


한국의 국권보존의 좌절로 일제황실의 궁성 앞에서 단식 투쟁도 하였다. 한국독립에 대한 일본정부와 지도층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도일하였고, ‘을사오적’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자 유배형을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명령으로 석방됐다.

1904년 단군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의 구심점이자 결속의 중심으로 민족 종교를 세우는 것이 더 시급한 일임을 각성하고, 단군 한배검으로부터 묵계를 얻어 1909년 서울에 단군교단을 설립, 오기호, 김윤식, 김인식, 이기 등 애국지사들이 참여하고 홍암은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이때 사용한 ‘중광’이란 다시 빛냄을 말하는데, 단군교는 단군 시대부터 존재하던 민족고유의 종교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의미이다.

홍암은 외세와 외래종교의 유입으로 단군의 역사가 잊혀지고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정신이 약화되자, 고유의 종교를 토대로 한 민족정체성이 살아나야만 국권회복과 민족갱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일제의 탄압이 있자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대종교의 종(倧)이란 조화주이자 교화주이고 치화주인 삼신일체 하느님인 단군한배검을 지칭하며, 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모두가 복락을 누리는 도덕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대종교는 민족운동과 불가분의 관계였는데, 교당은 민족운동의 집합 처였고 포교활동이 곧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민족교육활동이었다. 민족운동의 주요지도자 중,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박은식, 신규식, 이동령, 이시영, 조성환 조완구 등 10여명은 대종교의 신도였으며, 또한 신채호, 박은식, 주시경, 신규식, 정인보, 이극로, 안호상 등도 대종교인으로서 국학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개천절의 명칭도 대종교에서 비롯되었고,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이 자리 잡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종교의 민족적 성격으로 인해 일제의 방해책동이 가시화되자 본부를 만주로 옮겼다. 1914년에는 교인수가 30만명에 이르자 일제는 긴장하여 결국 포교를 불법화하는 조치가 내렸다.

대종교의 민족정신으로 의열 투쟁, 독립전쟁, 3·1운동, 임시정부 등 거의 모든 독립운동 분야에서 활동하였으며 국어, 국사 등 문화운동 분야에도 엄청난 분들이 공헌을 남겼다.
▲한글運動의 人脈 - 주시경, 지석영, 김두봉, 이극로, 최현배 ▲民族史學의 脈 - 김교헌, 박은식, 신채호, 류근, 정인보, 이상룡 ▲ 抗日獨立運動의 脈 - 신규식, 이동녕, 박찬익, 조성환 등이 계신다.

홍암은 대종교가 가지는 보편종교로서의 성격을 들어 일제에게 포교권을 인정하도록 설득하였지만 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경술국치로 국운이 날로 쇠하던 때에 단군의 홍익철학을 민족의 구심으로 내세워 민중을 일깨웠으며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력으로 민족적 기개를 드높이신 자랑스런 선구자 이셨다.

홍암은 우리 민족의 정신지도자로서, 한민족의 전통에서 정신적 맥을 찾아 선도문화를 부활시켰으며 민족자주정신의 구심 몫을 담당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을사오적암살단’을 조직하여 독립무장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기초를 마련했다. 나라를 잃고 러시아와 만주로 건너간 민족성원들에게 자주독립을 일깨워주어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 참가한 숱한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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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성 2013-09-27 19:20:20
제목을 홈암이 아니고 홍암으로 바꾸어주심이...클홍....바위 암자...인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