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와 경남 3·1운동 발상지를 문화재로 청한다
진주와 경남 3·1운동 발상지를 문화재로 청한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5.09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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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경화/향토사학자,진주문화원향토사연구위원

진주하면 촉석루. 촉석루하면 진주를 연상시키는 역사적 건축물 촉석루가 6·25전쟁 때 불타고 사라졌다. 이 때 미군의 도움으로 강수영 선생이 총감독이 되어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약 4년만에 완공했다. 이제 50년이 넘었으니 유형문화재로 지정될 자격을 가졌다.


밀양 영남루와 남원 광한루는 보물147호와 보물 281호로 지정됐다. 문화재 자료 제8호로 지정될 당시에는 중건된 기간이 짧았으나 이제 50여 년이 지났으니 심의기준을 통과한 것이다. 그래서 서장대는 문화재 자료 6호로 지정됐다. 진주시 서문의 지휘장대로 절벽위에 위치해 사방을 전망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일제 강점기에 풍우로 허물어져 1934년 5월 진주시 봉래동 부호 서상필 선생이 당시 700원이란 거액으로 중건해 80년이 지났다. 그러므로 유형문화재로 지정될 자격을 갖췄다.

북장대는 진남루라고 하는데 진주 북편을 조망하고 지키는 중요한 장대로 외성과 내성을 지키는 지휘소였다. 영남포정사 문루는 진주에 도청이 소재할 때 도청 정문으로 사용된 역사성이 있으니 문화재 자료 3호로 만족할 수 없다. 바로 앞은 3·1운동 당시 성난 군중 3만여 명과 기생, 걸인, 노동독립단이 시위를 전개하다 300여명이 체포된 곳으로 역사성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조사·발간한 독립운동사적지 324-325면에 기록됐다.

창렬사는 문화재 자료 5호로 지금부터 80년 전 일제 강점기 때 창렬사중건위원회와 유지위원회가 조직되어 회장 정태석. 부회장 이현중, 강만수, 총무 박진환, 강대창, 정몽석, 이풍구 등이 앞장 서 봉사했다.
진주시 집현면 하촌리(현 하촌동)에는 한 마을에 친일과 항일이 다함께 존재한다. 친일파 사전에 오른 연예인 남인수의 생가라 하여 등록문화재 153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같은 마을 30m 이내엔 진주와 경남 3·1운동을 총 지휘한 순국투사 김재화 선생의 생가가 존재한다.

1919년 3월 고종황제 인산에 참예한 박대업, 강달영, 김재화, 권채근, 이강우, 심두섭 선생 등이 발목 댓님속에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도청. 도경이 있는 엄중한 시내를 벗어나 조용한 시골인 하촌리 김재화 선생 자택에서 비밀 작전을 세우고 서부경남 일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김재화 선생은 특별히 교유문을 작성하고 시위 당시 사방에 배포했다하여 혹독한 고문을 받고 혼절했고 거의 죽게 되자 석방시켰는데 곧 순국했다.
필자가 수년전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김재화 선생의 생가임을 밝히고 성장한 사실과 진주 경남 3·1운동 발상지요 모의지 임을 밝히는 작은 기념비를 세웠다.
김재화 선생의 생가인 222번지를 찾아 지적도 원부를 찾아보면 김재화 선생의 이름이 나온다.

‘부산경남 3·1운동사 : 1979년 3·1동지회 발간’ 422면에 진주와 경남 3·1운동 최초 모의지로 기록되어 확실하고 이용락의 ‘3·1운동실록’과 ‘경남독립운동소사’에도 김재화 선생이 3·1운동 총지도자이며 생장지 임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경남도 문화재로 지정·보호해야 한다. 가수 남인수 보다 순국투사 김재화 선생을 기리는 사업이 더 긴요하다. 진주시와 경남도 그리고 지난 3일 위촉된 문화재위원 34명은 이와 같은 시민들의 청원을 수용해 주기를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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