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진주 강씨, 진주의 스피릿 코리안 스피릿
(5)진주 강씨, 진주의 스피릿 코리안 스피릿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5.29 19:35
  • 댓글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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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의 별 강이식 장군, 남명 조식, 그리고 천강 홍의 장군 이후(상)

진주 강씨 시조 강이식 장군 ‘


▲ 고구려의 명장 강이식(姜以式)장군
1592년 4월 14일(음)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9일 만에 곽재우장군은 의병을 모병하여 약 한달 뒤, 정암진 전투를 치루니 7년 임진왜란 중, 최초의 의병 승리라는 금자탑을 세운다. 곽재우장군의 모친은 진주 강 씨이다. 이로부터 약 천 여 년 전, 진주 강씨의 시조가 나라를 구하니 고구려의 명장 강이식(姜以式) 장군이시다.

남북조시대로 나뉘어져 혼란스러운 중국을 통일한 거대한 수(隋)나라 문제 양견(隋文帝 楊堅)은 고구려를 정복하기위하여 국서를 보내(서기 597년) 무리한 조공과 봉작을 요구한다. 이에 강이식장군은 “무례한 국서에는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할 일이다.”라고 하면서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 하였다.
 
고구려의 영양왕은 강이식 장군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5만 명의 기마병으로 출전하여 요서지방을 선제공격(서기 598년)하고 대승을 이룬다. 다시 강이식 장군은 임유관으로 출전하여 수 문제의 30만 대군과 싸워 또 대승을 거두니 마침내 수 문제는 패퇴하였다. 이후로 ‘중원을 통일한 위대한 황제’라 일컬어지는 수 문제도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끝내 침공하지 못하였다. 그 자존(自尊)의 자리에 고구려인들의 합창이 울려 퍼진다.

‘고구려의 노래’
오호 어리석은 한나라 어린애들아
요동은 향하지 마라. 개죽음이 부른다.
문무의 우리 선조 한웅이라 불렀느니
자손들은 이어져서 영웅호걸 많단다.
주몽 태조, 광개토님 위세는 세상에 울려 더할 나위 없었고
유유, 일인, 양만춘은 나라 위해 옷 바꿔 스스로 사라졌다.
세상문명은 우리가 가장 오래니
오랑캐 왜구 다 물리치고 평화를 지켰다.

유철, 양광, 이세민도 보기만 해도
무너져서 망아지처럼 도망갔다.
영락기공비는 천 척
만가지기가 한 색으로 태백은 높단다. ?

유철은 한 무제(漢 武帝)이고, 양광은 서기612년 살수에서 을지문덕에게 대패한 수 문제의 아들, 수 양제(隋煬帝)이다. 이세민은 당태종으로 서기 644년 고구려를 침공하나 결국 눈에 화살을 맞고 패퇴한다. 영락기공비는 광개토대왕의 비석이니, “한웅님의 뜻에 따라 세계만방이 한민족의 나라가 되나니 태백(태백산, 백두산, 태백 철학)의 기상은 높디 높다.”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대륙의 고구려인의 노래이다. 세계 전사 상 최대의 승리를 거둔 살수대첩의 을지문덕 장군부터 그 이후, 강감찬, 이순신, 김시민, 곽재우 등등, 나라를 구원한 한민족의 모든 명장들은 강이식 장군의 정신과 능력을 이어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줄기로 뻗어 나와 진주의 혼, 진주스피릿인 주체, 호의, 평등 정신의 유전자로 진주 인에게 닿았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강이식 장군의 무덤은 중국의 심양현 봉길선 원수림역 앞에 있으나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크게 훼손되어 현재는 거북좌대만 남아 있다.

한반도에는 경남 진주시 상봉동의 봉산사에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어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제향 한다. 지금도 진주 강 씨 후손들은 비록 시집을 갔더라도 소략하게 물을 떠놓고 강이식장군의 제를 올리니 선조를 기리는 갸륵한 마음이 민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다른 진주정신 남명 조식 선생

또 한명의 진주정신을 대표하는 분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년 ~ 1572년)선생이다. 선생은 경상도 삼가현 출신(현,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태생으로 우리나라의 유학자들 중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된다. 성호 이익은 남명 조식선생에게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東方氣節之最)”이라는 찬사를 부여하였다. 최고의 선비 조식은 경상 우도를, 대학자 퇴계 이황은 경상 좌도를 대표하는 학계의 쌍벽을 이루었고, 동갑인 그들은 직접 만나지는 않았으나 편지를 서로 주고받으며 친밀하게 지냈다.

경상도의 학자들은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을 모두 존경하여 두 사람을 번갈아 찾아가며 가르침을 얻었기에 양파는 학문적으로 많은 교류가 이루어졌다. 퇴계학파는 보다 인仁을, 남명학파는 보다 의(義)를 중시한 특징이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과 엄정하게 솟은 지리산을 각각 닮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남명 조식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하였다. 선생의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는 대체로 남명학파의 의(義)를 지키는 추상같은 의식과 열렬한 행동의 공통된 태도이자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남명을 처벌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비등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남명 조식 선생은 평생 열 차례 이상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한 번도 취임한 적이 없었다. 남명의 문하들로 김효원, 김우옹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 같은 관료, 의병장 곽재우가 배출되었다. 곽재우 의병장은 대의(大義)를 가르쳐 주신 남명 조식의 문인이자 외손녀 사위이고, 생모는 진주 강 씨이다. 이 얽이고 설킨 유전자가 지금 진주의 스피릿을, 코리안 스피릿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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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2011-06-11 15:36:28
역시 자랑스럽습니다! 저런 기상을 본받고 싶습니다. 큰 대의를 가슴에 품은 모습 말이죠!!

안진규 2011-06-11 15:25:14
선조님들의 자랑스런 기게를 느낄수 있어서 좋네요

김지인 2011-06-11 13:54:03
자랑스런 조상님들

하윤영 2011-06-11 13:07:04
고구려의 노래 참 인상깊습니다..^^

333 2011-06-10 23:44:57
음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