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과 독일 국민
나폴레옹과 독일 국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5.1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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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진/수필문우회 회장

독일(Deutschland)이라는 나라는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유럽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있었던 것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응집력이 느슨한 명목만의 나라로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같은 314개의 작고 큰 연방국가들이 분립해 있는 국가들의 모자이크가 제국을 이루고 있었을 뿐이었다. 더구나 그 속에는 1475개나 되는 제국기사령(帝國騎士領)까지 포함되어 있어 합계 1789개나 되는 자립적 권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 중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프랑스대혁명에 간섭하는 전쟁을 1791년에 일으키지만 패배함으로써 라인강의 좌안지역을 1794년에 프랑스국민군에게 빼앗기게 된다. 프로이센은 1795년 프랑스와 단독강화를 하고, 1801년 오스트리아도 프랑스의 점령지 영유권을 인정하는 화약을 맺었다.

프랑스에 나폴레옹이 등장하자 1803년 그의 권고 하에 신성로마제국 대표자회의가 소집되어 종교제후령을 중심으로 한 112개의 제국제후령(帝國諸侯領), 41개의 제국도시, 모든 제국기사령이 폐지되고 그 영지와 주민은 그들의 중핵이 되는 이웃 나라에 흡수 합병되도록 결정됐다.

나폴레옹에 의한 신성로마제국 여러 영방의 과감한 통폐합은 1806년에 더 한층 강화되어 바이에른을 비롯한 서남지역의 16개 나라가 라인연방을 결성하게 되고,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이탈을 선언한다. 같은 해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도 어쩔 수 없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에서 퇴위하여, 9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신선로마제국은 정식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1795년 프랑스와 강화를 맺고 전란을 피해온 프로이센은 그동안 국력을 충실히 배양해 왔다. 1806년 프랑스와 하노버 영유권을 두고 대립했을 때 권토중래를 노리고 영국, 러시아, 스웨덴 등과 더불어 제4차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최성기에 있던 나폴레옹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개전한지 겨우 5일 만에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1807년에서 그 다음 해까지 4개월에 걸쳐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는 겨울의 베를린에서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 고함 (Reden an die Deutsche Nation)’라는 연속강연을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행했다. 피를 토할 것 같은 어조로 행해진 이 강연은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강연에서 ‘독일 국민(Deutsche Nation)’이란 호칭을 사용하며 베를린 시민에게 호소했지만 19세기 초두까지는 그러한 이름의 국민이 있거나,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 그러한 호칭은 허구 위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하나 분명한 것은 피히테와 같은 한 무리의 지식인들이 독일인이란 전체를 염두에 두고 하나의 환상으로서의 국민의식을 환기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 환상이 단지 허구에 머물지 않고 결국 실체를 갖추게 된다. 강력한 군대, 경찰, 학교 그리고 관료 기구를 갖춘 신생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의 길을 매진하게 되고 그것이 오늘의 독일로 결실을 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혁명이념의 수출과 나폴레옹의 지배는 독일의 여러 나라에 굴욕만 가져다 준 것만은 아니었다. 독일 국민에게 독일이라는 통일국가에 대한 열망과, 그들이 하나된 독일 국민이라는 국민의식’을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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