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 가요제 부활되어야
남인수 가요제 부활되어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5.29 18:2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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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진주문화원장
강압에 의한 단순친일과 민족 반역행위의 친일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일부 시민단체에서 시류에 편승하여 친일 행적에 대한 경중을 면밀히 따져 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시켜 역사적 진실을 왜곡시키는 우를 범한 것 같아 많은 의문점을 시사하고 있다.

수년전 남인수 가요제 말이 나왔을 때 만해도 서로 가요제를 하겠다고 무슨 경쟁처럼 하더니 어느날 갑자기 헌신짝처럼 내 팽개쳐 버린 진주 인심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한때는 남인수 동상까지 세운다고 법석을 떨더니 지금은 남인수 이름 석자마저 매몰시켜 버리는 세태를 바라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남인수 선생의 친일행적의 가장 큰 문제는 일본 군가를 불렀다는 것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유라고 언론에 보도 된바가 있었는데 노래 잘 부르는 남인수에게 강압적으로 군가를 부르라고 하는데 당시 상황으로 보아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배겨날 사람이 있었겠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왜놈들의 군가를 남인수 선생이 작사. 작곡하여 불렀다면 이것은 분명히 친일에 해당되겠지만 일제가 작사. 작곡 한 것을 가수로서 한번 부른 것을 민족반역으로 몰아 친일로 매도할 정도라면 일본글을 가르치고 배운 사람도 친일인명 사전에 모조리 등재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천년고도 진주가 언제부터 문화예술의 도시라고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는지 가수 남인수와 이재호, 손목인을 떠올려 그 실상부터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일제시대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왕래하던 연락선의 애환을 눈물의 해협이라는 제목으로 노래를 부르자 일제의 금지곡이 돼어 1935년 애수의 소야곡으로 제목을 바꾸고 가사도 다소 변형시켜 오케레코드사에서 출반한 이 노래는 빼앗긴 나라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져 민족의 심금을 울렸던 것을 상상해 보면 그렇게 단순히 친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인수(본명 강문수)라는 불세출의 가수로 하여금 조국광복의 희망을 심어주고 간접적인 항일정신을 일깨워 주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일제 강점시대의 가수활동은 오늘날의 가수활동과는 전혀 비교 할 수 없는 애국 충정이 서려있었다는 것을 그 당시 노래를 그 시절로 돌아가 한번 불러보면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이밤 이 구절은 나라 잃은 백성이 아무리 운다고 해도 나라를 빼앗기지 않은 옛날 그때 그 시절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탄식하며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래보는 구슬픈 밤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노래를 생각할 때 일제 강점시대 우리민족 끼리 이심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애수의 소야곡이라든지, 나그네설움, 번지 없는 주막, 낙화유수, 타향살이 등 이때 즐겨 불렀던 노래의 가사를 더듬어 보면 하나같이 민족 애환이 서려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그네 설움의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가야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 이 구절의 낯익은 거리는 고향을 의미하지만 밤이슬을 맞으며 찾아온 고향은 일제가 득실거리고 있으니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가있는 이국땅 상하이나 용정보다 더 차거운 거리라는 표현이고 가야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다는 것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 태양을 임금으로 비유하여 우리민족의 통치권자가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탄식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일제시대의 작사가와 작곡가 가수 모두 항일독립운동가였음을 그때의 노래를 그 시절로 돌아가 음미하면서 불러본다면 감히 남인수 선생을 친일이라고 매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남인수 선생의 가수 활동은 항일독립운동의 촉매제가 된 셈이므로 항일독립운동가로 재조명 되어야 하며 진주출신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주옥같은 노래로 진주의 명성을 떨친 공적을 생각해서라도 남인수 가요제는 반드시 부활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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