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화의 뿌리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일본 근대화의 뿌리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6.13 17: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수곤/밀양동명고 교사ㆍ경남국학원 이사

임진왜란 이후 북방에서는 여진족의 누르하치 세력이 강해해지면서 북방으로부터 새로운 위협이 조성되고, 일본은 도쿠가와(德川家康)가 집권하여 화평을 제의해 왔는데, 조정에서는 화평 하느냐의 여부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리다 1607년 여우길 을 정사(正使)로 하는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파견하였다.

에도(江戶:동경)로 간 일행은 5월 6일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하자, 도쿠가와는 조선왕에게 감사의 국서를 보내면서 “권세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의(信義)에 기초를 한 국교를 맺고 싶다”고 강조했다. 여기에는 일본의 간악한 속셈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은 명을 치러 가는 데 필요한 길을 빌려 달라는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 이었는데 어찌 은혜의 나라 조선을 밟고 명을 치러간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말속에는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의미를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조선을 우롱하여 침략 한때는 언제이고 자기들의 경제, 문화 성장의 발판을 삼기 위해 이리의 탈을 쓴 언행은 지금도 변함이 없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선조40)부터 1811년(순조11)까지 전후 12차례 파견했는데 처음 3회는 회답겸쇄환사라 불리었다. 그것은 일본이 보내온 국서에 대한 회답 및 납치되어 간 사람들을 본국에 데려오는 쇄환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그 후의 9회는 통신사(通信使)였다. 통신사는 정사, 부사, 종사관으로 된 3사를 위주로 470~500명 정도로 이루어졌는데, 문화 교류에 대비하여 제술관과 서기3명 역관(譯官) 사자관(寫字官)에는 대표적인 학자 문인을  임명했고, 제1급의 의학자와 화가를 동행시켰다.

일행이 에도까지 왕복하는데 6-9개월 정도 걸렸는데 에도는 물론 기항지나 연도의 숙소에는 선진 문화와 접하려고 찾아오는 일본인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교과서에는 메이지유신 이후 에도시대를 ‘쇄국의 시대’ 로 묘사하고 있는데 교과서에 따라서는 ‘대마도가 조선과 무역을 했다’로 간단히 기술 할 정도이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정부의 최고 관료와 학자, 문화인을 비롯하여 화려한 악대(樂隊) 소동(小童) 무인(武人) 통역관 등 300~500명에 달하는 대사절단이었다. 에도로 향하는 일행의 접대역을 하명 받은 각 지는 물론 일반서민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행렬의 현란함에 감탄했으며, 통신사 일행이 묵었던 숙소에는 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학문, 예술을 전수 받으려 했다. 수야파(狩野派)로 대표하는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행렬 그림 두루마리와 병풍 등이 지금도 국내외에 남아 있어 그 행렬의 장대함과 일본이 어떤 마음을 접대를 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아들을 낳지 못한 산모는 통신사에게 아들 낳는 비결을 묻기 했으며, 통신사가 뒷간에서 나오면 기다렸다 뒤 처리한 문종이를 말려서 글공부를 했다고 하니 대마도를 비롯한 일본사람들의 조선통신사에 대한 관심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하지만 지금 일본은 보은(報恩)의 역사를 거꾸로 역사를 왜곡하고, 위안부, 독도 문제 등으로 우리의 혼과 얼을 흔들고 있다. 이 모든것들이 우리 스스로 역사 교육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얼 찾기 교육, 정체성 정립 교육으로 우리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인간사랑 나라사랑, 지구사랑의 지구인 철학을 실현하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