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화해의 소망
용서와 화해의 소망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5.3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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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수필가

통영효음음악학원원장

 

해마다 봄꽃이 산야를 덮으면 4·19가 온다. 해마다 찾아오는 민주혁명의 추억이지만 올해는 특별했다. 51년 만에 가해자가 사죄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51년 전 85세의 대통령은 3·15 부정선거를 지시하지도, 학생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국 부정과 학살의 최종 책임은 집권자에게 있는 것이다. 사실 4·19에 대한 이 대통령의 반응을 고려하면 오늘의 사죄는 늦은 감이 있다. 이 대통령은 4·19혁명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높게 평가했다. 그는 부상 학생들을 위문하면서 “내가 받을 총탄을 너희들이 받았구나”라며 안타까워했다.
 
이 대통령 측의 사죄는 이승만을 둘러싼 역사적 논란에 새로운 지평이 될 수 있다. 50여 년 동안 분노는 살았고 이승만은 역사 속으로 물러난 것이다. 혁명 세대를 비롯한 다수 국민에게 이승만은 독재와 부정의 대통령이었다. 최근까지도 비판세력은 그를 부정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의 현대사를 부끄러운 역사로 규정했다. 4·19 때 무너진 이승만 대통령 동상은 아직도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1965년 하와이에서 서거 후, 그의 유물은 현재까지 서울의 낡은 이화장에서 간신히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

화해와 용서는 종교적 화두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어젠다도 될 수 있는 것일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용서의 메시지가 강렬한 것도 없다. 원수에 대해 복수를 해도 시원치 않은데 사랑하라고 하다니….

정치는 어떤가. 정치는 용서와는 어울릴 수 없는 살벌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승자는 으쓱대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패자는 쓰디쓴 쓸개를 먹으며 복수를 다짐하는 곳이 정치가 아닌가. 승패만 있고 화해는 없다는 사실은 선거 때마다 뼈저리게 절감한다.

정치에서 용서와 화해를 화두로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 남아공 대통령, 만델라다. 그는 일생 동안 백인에 의해 혹독한 박해를 받았지만, 대통령이 된 후 용서를 실천했다. 백인들이 열광했던 럭비팀 해체를 막은 것은 놀라운 일화이다. 원한대신 용서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그래서 남아공은 내란을 겪지 않고 화합의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그 화해와 용서의 정신이 왜 이 시점에서 절실한 것으로 느껴지는가. 우리 공동체엔 두 개의 균열점이 있다.

하나는 호국세대와 4·19세대의 불화고, 또 하나는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불화다. 이 가운데 최근 호국세대가 4·19세대와의 불화를 치유하고자 나섰다. 지난 4·19기념일에 피해자 측에 사죄하려고 간 것이다. 물론 극적인 화해가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긴 호흡으로 보면 화해의 물꼬는 튼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유·평등·인권·민주주의 속에 잉태된 나라다. 대한민국 건국이야말로 이 땅을 거룩하게 만든 첫걸음이 아니었던가. 그 첫걸음을 떼지 못한 북한은 최악의 국가가 됐다. 이승만 박사는 혼란스러웠던 해방 공간 속에서 건국을 구상했고, 자유의 나라를 만들었다. 그 자유의 나라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위협을 받았을 때 미국과 유엔의 도움을 받으며 그 위협을 물리쳤다. 그리하여 이 땅은 호국용사들의 피로 거룩해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자유의 신선한 향기가 온 땅에 퍼진 것은 아니다. 4월의 젊은 사자들이 있었기에 민주주의는 법조문을 넘어 우리의 가슴 속에 새겨지게 된 것이다.

피를 흘린 그들이 아니었던들 어떻게 우리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을 것인가. 결국 건국세대와 4·19세대가 이 땅을 자유가 살아 숨 쉬는 거룩한 땅으로 만든 것이다. 민주공화국의 건국 없이 어떻게 4·19 혁명이 가능했을 것인가. 이승만 박사에 의한 대한민국 건국과 젊은 사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흘린 피가 더불어 소중하기에 양자는 같이 가야 할 동행의 관계다.

오랫동안 양자가 내외하듯 서로를 경원시한 것은 잘못이다. 그렇다면 만델라가 백인 럭비팀을 구했듯이 4·19세대가 이승만 대통령을 구할 때가 된 게 아닐까. 지금이야말로 4·19세대가 이승만 박사를 건국·호국 대통령으로 부르며 참으로 아름다운 화해의 모습으로 자리매김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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