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작은 행복들
어느 날의 작은 행복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6.27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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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석/합천노인회 사무국장

 
초여름인데도 날씨가 며칠째 칠팔월 한여름같이 덥다. 오늘도 후덥지근한 게 꽤 무더운 날씨다. 오늘은 일요일, 며칠 전부터 미뤄왔던 마당 잔디 깎기와 집 주위 나무 손질을 하기로 마음 단단히 먹었다. 조금이라도 시원할 때 하려고 아침 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소매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마당은 잔디밭과 나무 몇 포기가 서 있는 작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빨간 장미가 담 너머를 기웃거리며,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자태를 자랑하고 있고, 그 옆에는 분홍 접시꽃과 푸른 잎 속의 빨간 앵두가 앙상블을 이루며, 초여름을 노래하고 있다.

주변 산과 들이 푸르다 못해 검푸른 빛을 띠며 한여름 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집이 마을 외곽에 있어 그런지 주위가 적막감이 감도는 고요가 깔려 있고, 뒷산 골짜기에서는 아침부터 풀국새가 처량하게 울고 있다. 막 일을 시작하려는데, 집 뒤 가까이 있는 배 과수원에서 배 봉지 싸는 아주머니들의 소란스런 얘기소리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연신 들려온다.

무더운 날씨에 작은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배 봉지 싸기에 힘이 들 터인데도,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또래의 아주머니들이 모여 함께 일하니 고됨도 잊어버리고 꽤 즐거운 모양이다.집 옆 살구나무 아래 매어둔 발바리는 그새 아침 식사를 마쳤는지, 땅바닥에 배를 붙이고 누워 눈을 지그시 감고 평화롭게 졸고 있다. 내가 조금 크게 움직일 때마다 살며시 실눈을 떠서 빙그레 웃는 표정으로 누운 채 꼬리를 살랑거린다. 오늘은 모처럼 주인이 집에서 일하고 있으니 집을 지켜야 하는 부담이 없어 그런지 아주 편안한 모습이다. ‘그래 오늘은 내가 집에 있으니, 너는 마음 푹 놓고 한숨 늘어지게 자거라’ 혼자 중얼거리며 풀 깎기를 시작했다.

한참 잔디를 깎다가 돌아보니 정원이 제법 깨끗해져 간다. 벌써 윗도리는 군데군데 땀으로 얼룩졌다. 제법 힘이 들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라 오늘 끝낼 작정으로 열심히 잔디를 깎고, 화단의 잡초를 맸다. 잡초는 정말 생명력이 끈질기다. 작년에 이어 올봄에도 벌써 두 차례나 뽑았는데도, 마치 나한테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는 듯이 이렇게 왕성하게 자라고 있으니 말이다. 정원 옆 개나리 울타리 위를 참새들이 이리저리 재잘거리며 날아다니고 있다. 여름이라 벌레 등 먹을 것이 많아 신이 났는지 재잘거리는 모습이 아주 행복해 보인다.

두어 시간 일하고 빵과 우유로 중참을 먹은 뒤, 잠시 쉴 요량으로 집 옆 외곽 도로를 따라나섰다. 바로 옆 산소 주변과 못 둑에 하얀 개망초가 마치 두터운 꽃 이불을 펼쳐 놓은 듯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누구도 관심 있게 봐 주는 것 같지 않다. 바로 아래 논에서는 집안 할아버지 한 분이 감자를 캐고 계셨다. 고랑마다 캐 놓은 주먹만 한 하얀 감자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기에도 탐스럽다. 할아버지는 “올해 감자알이 굵고 많이 들었다”며 먼지와 땀이 범벅된 얼굴을 연신 닦으면서도 싱글벙글 기분이 좋다. 또 그 위 논에는 봄볕에 얼굴이 구릿빛이 된 60대 농부가 일꾼들과 양파 수확이 한창이다. “어느 해보다 양파 농사가 잘되었고, 올해 값도 좋을 것 같다”며 입이 귀에 걸렸다.

모두 흡족하고 즐거운 표정들이다.무더운 날씨에 힘든 배 봉지를 싸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아주머니들, 땡볕 아래 감자, 양파를 수확하며 흡족해하는 농부들, 나무 그늘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평화롭게 누워있는 우리 집 발바리, 제철을 만나 개나리울타리 위를 신나게 날아다니며 노래하는 참새들, 모두가 나름대로 작은 행복감에 젖어 있는 모습들이다. 나는 이들에게 로또 당첨 같은 큰 행복은 아니지만, 오늘 같은 작은 행복이라도 늘 함께 해 주기를 기원해 본다.

종일 무더운 날씨에 땀 흘리며 고생하였지만, 오늘 내가 만난 사람들, 발바리, 참새들 모두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훤하게 정리된 정원을 바라보며 작은 행복을 느낀 하루였다. 유월의 긴 하루해가 저물어간다. 아직도 뒷산 골짜기에서는 풀국새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풀국새 우는 소리는 언제 어디서 들어봐도 행복해서 부르는 노래는 아닌 것 같다. 무슨 슬픈 사연이 있어 언제나 저렇게 슬피 우는 것일까. 작은 행복감에 젖어 있는 내 가슴 한편에 애잔함이 잔잔한 밀물처럼 스며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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