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의 음악
드뷔시의 음악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7.09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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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진/수필문우회 회장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7년)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에는 부친 마뉘엘(Manuel)의 생업이 안정되어 있지 않아 기초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참패로 파리에 코뮌이 성립되었을 때, 마뉘엘은 파리코뮌 측의 국민위병으로 참가했다가 임시국방정부의 진압군에 사로잡혔다. 소위 ‘피의 주간’으로 알려진 1주일 동안 진압군에 의하여 코뮌 측 가담자에 대한 즉결 처분이 무자비하게 자행되었지만 마뉘엘은 부인의 필사적인 탄원으로 사형을 간신히 모면했다.

그와 한 감방에 구금되어 있다가 한 걸음 일찍 풀려난 시브리(Charles de Sivry)는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다는 감옥동료의 아들 드뷔시를 칸(Canne)에 거주하고 있는 자기의 모친 ‘마리 모테 드 플레비유’에게 천거해 주었다. 마침 칸의 고모집에 가서 의지하고 있던 소년 드뷔시를 만나본 그녀는 그의 남다른 재능을 즉시 간파하고 1년간에 걸쳐 피아노 레슨을 열성적으로 베풀어 주었다.

1872년 드뷔시는 ‘파리국립음악원’에 거뜬하게 입학할 수 있었다. 특히 그 해 특별반 마르몽텔(Marmontel)피아노 클래스에 입실이 허용된 자는 총 합격자 157명 중 39명이었고 남학생은 그 중 단 8명뿐이었다. 그러한 놀라운 결과는 모테 부인의 지도도 탁월했지만 겨우 만 10살을 넘긴 드뷔시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증명된 하나의 사건이었다.

드뷔시는 그로부터 10여년 ‘파리국립음악원’에 재적했었지만 학교의 오래된 규범과 가르침에 맹종하지 않는 자기 주장이 강한 학생이었다. 결국 피아노주자가 되는 길에서는 좌절하고 말지만, 작곡 쪽으로 열정을 기울여 1884년 칸타타 ‘탕아(蕩兒) L'enfant prodigue’를 작곡해서 ‘로마대상’ 제1등 수상자가 되었다. 1885년 로마로 간 드뷔시는 수상자에게 주어진 4년간의 로마 메디치가 유학생활을 최소한의 의무기간인 2년만으로 줄이고 1887년 조기 귀국했다.

파리로 돌아온 드뷔시는 몽마르트에 다락방을 마련하고 생활하면서 그 당시의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 등 일련의 예술가들과 어울려 새로운 문학, 미술, 음악에 대한 토론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드뷔시는 이러한 생활을 통해 인상주의 음악에 대한 구상을 굳혀 갈 수 있었다.

인상주의 음악은 흔히 들을 수 있는 장조, 단조의 음조들을 사용하지 않고 5음계나, 온음계 같은 것을 사용하여, 고전파나 낭만파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음악세계를 표현했다. 또 대체로 2마디 정도의 짤막한 악절을 사용해, 짧은 음을 반복함으로써 소리의 효과를 풍부하게 만들어, 음악의 전체 구조에 영향을 주었다. 짧으면서도 때로는 반복하기도 하는 소절들이 이제까지 즐겨 사용해 왔던 정통 소나타 형식하고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음악구조를 탐색하고, 발견하거나 만들어 사용했다.

드뷔시는 이러한 인상주의 음악의 작곡기법으로 많은 아름다운 곡들을 만들어 냈다. 피아노 독주곡 ‘베르가마스크 조곡’ 가운데 제3곡 ‘달빛’은 가장 잘 알려진 대중적인 곡이다. 관현악곡 ‘목신의 오후 전주곡’은 드뷔시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최초의 걸작이고, 교향시 ‘바다’는 그의 음악 중에서 가장 뛰어난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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