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서대소인야, 허침대성인야(趙之瑞大小人也, 許琛大聖人也)
조지서대소인야, 허침대성인야(趙之瑞大小人也, 許琛大聖人也)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5.30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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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택/동진초등학교장
15일은 스승의 날이었다. 오늘날 학생과 사회가 요구하는 스승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생각이 미치면, 떠오르는 글귀이다.

이 글은 후일 연산군이 되는 ‘융’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두 스승인 보덕 조지서(趙之瑞)와 필선 허침(許琛)을 평하여 쓴 낙서라고 전해진다.

세자시강원은 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이며,  사(師), 부(傅), 이사(貳師), 좌·우빈객(左右賓客), 좌·우부빈객(左右副賓客), 찬선(贊善), 보덕(輔德), 겸보덕(兼輔德), 진선(進善), 필선(弼善), 겸필선(兼弼善), 문학(文學), 겸문학(兼文學), 사서(司書), 겸사서(兼司書), 설서(說書), 겸설서(兼說書), 자의(諮議) 등의 관직에 관리 각각 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지서(1454-1504)와 허침(1444-1515)은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세자 ‘융’ 날마다 놀이만 일삼고, 학문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단지 부왕 성종의 훈계가 두려워 억지로 서연(書筵)에 나올 뿐이었다고 전해진다. 성종이 세자를 불러놓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 할 때, 성종이 아끼는 사슴이 그의 옷과 손등을 핥아대자,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하여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고  전해진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통념이 지배하는 조선사회에서 일반 학생들이야 회초리로 훈육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세자교육은 힘들고, 인간적 고뇌도 컸으리라 짐작된다.

두 스승의 성격, 교육방법, 인생은 대조적이었다. 조지서는 천성이 굳세고 곧은 데 비해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었으며, ‘융’ 학문에 태만히 할 적마다 조지서는 그를 깊이 질책하고 성종에게 이르겠다고 하였는데 비하여 허침은 언제나 부드러운 말씨로써 매번 깨우쳤다. 그 결과 ‘융’은 조지서를 싫어했고, 허침을 좋아했으며, 급기야 ‘조지서는 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趙之瑞大小人也, 許琛大聖人也)’라고 낙서를 하기에 이른다.

후일‘융’은 왕위에 오르자 1504년 갑자사화 때 가장 먼저 스승 조지서를 죽이고, 성종이 아끼던 사슴까지 활로 쏘아 죽였다고 전해진다. 반면 허침은 승승장구하여 좌의정에까지 오른다.

오늘날 교실현장에는 ‘융’처럼 교육하기 힘든 아이들이 한 두 명이 아닐 것이다. 엄하게 훈계라도 하면 ‘교원평가 때 보자’라든가, ‘돈 많이 벌어 놨어요(잘릴 텐데.)’, ‘선생님이 폭행해요(신고)’라고 말하는 상황이니, 조지서선생 만큼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선생님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허침선생 같은 포용력, 인내심과 기다림이 필요한 시절이다. 친구 같고, 아버지, 어머니 같은 선생님을 필요로 하는 사회이다. 교육은 원래 믿고 기다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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