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베옷이 곧 부처
삼베옷이 곧 부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7.18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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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규/신라문화보존회 경상남도지부장

 
신라가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내 주었을 때 신라왕자 마의태자는 비단옷을 삼베옷으로 갈아입고 망국의 슬픔을 되씹으며 계골산(금강산)에 입산했다. 일부 역사가는 이를 두고 태자의 신분에서 평민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평민들의 의복인 삼베옷으로 갈아입은 것이라고 단순히 해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직계가족이 상을 당하면 삼베옷을 입듯이 여기에는 신라의 망국과 왕의 폐위로 인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사회과학적 철학의 깊이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삼베에 얽힌 애환은 아낙들의 한숨으로 그치지 않는다. 조선 초기 정종 때 여진족에게 되찾은 육진지역에서는 관에서 아들을 낳자마자 군적에 올려 병역세인 군포를 거둬들였다. 이 군역세가 얼마나 혹독했던지 서민들은 이를 면하기 위해 사내아이를 낳으면 고추를 잘랐다는 참혹한 정경이 기록에 남아있다. 유계 ‘포남집’에는 이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남아있다. 

“춘삼월에 삼씨를 뿌려 칠월에 거두고 닷새 동안 삼을 앗아 열흘을 빨고 빤다. 섬섬옥수 손 끝 놀려 세삼베 짜내니 얇기가 거미나래 한줌에 쥐어 든다. 아까와라 남도상인에 팔아 관 빚 갚기 분주하니 내 몸은 누더기요 붙은 발도 못 가린다” 

이처럼 혹독하고 수탈에 가까운 군포 탓인지 당시 서민들은 삼베를 곱게 짜지 않았다. 베가 거칠 뿐만 아니라 베 폭도 좁아 관에서는 머리를 짜내 질이 좋은 베를 짜면 세 사람 몫을 한 사람 몫으로 계산해주기도 하고 가장 질이 좋은 베는 6년 군포를 대신해 주기도 했다. 그래서 육진 지방에서는 삼베를 일컬어 부녀자들의 원한이 올올이 맺혀 있다고 해서 ‘원포’라 부르기도 했다.

삼베는 더운 여름철을 나는데 제격이다. 명주나 털 같은 동물성 섬유가 피부에 잘 붙은데 비해 삼베와 같은 식물성 섬유는 까슬까슬한 것이 피부에 잘 붙지 않으며 몸에 꼭 맞지 않고 여유 공간을 만들었다. ‘옷이 몸에 붙으면 복 들어갈 틈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의 의복생활에서 이러한 여유 공간은 삶의 지혜임을 알 수 있다. 이 여유 공간에 공기가 들어가 살갗의 땀을 증발시키고 바람을 일으키는 자연바람을 삼베옷이 담당했던 것이다. 선문답을 즐기는 고승들의 이야기에 이런 삼베옷의 시원함을 ‘부처’에 비유한 예가 있다.

한 수행승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더운 여름에 삼베옷을 입고 있던 고승은 이렇게 대답했다.  “마삼근”
몸을 덥지 않게 해주는 삼베옷을 부처로 보고 그것에 감사한다고 말한 것이다. 만물에 불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불자들에게 한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게 해주는 삼베옷도 부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커덕 척, 철커덕 척“ 이제 우리 주위에서 이런 베틀 짜는 소리는 들을 수가 없다. 특히 최근에는 값싼 중국 삼베가 물밀듯이 밀려와 서민들에게는 삼베로 만든 제품들을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고 있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삼베문화는 사라지고 있으며 전통 의복문화도 바뀌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삼베를 짜는 물레 소리를 다시는 듣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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