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맛도 모르면서
커피 맛도 모르면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5.30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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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지/SK에너지
사보편집기자
어린 시절엔, 얼른 커피 맛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엄마를 졸라 티스푼으로 딱 한입 얻어먹고 아쉬운 표정을 한껏 지어 봐도, ‘어린이’에겐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 어른 경험. 궁금한 게, 새로운 게 너무나 많았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등굣길에 매일같이 마주치던 남자애를 보면서 ‘설렘’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나보다 못생긴 우리 반 여자애가 그 애의 여자 친구임을 알고는 ‘실연의 아픔’도 겪었다. 인생에 첫사랑보다 더 슬픈 것은 없을 것만 같던 시절.
‘in서울!’ 따위의 문구와 영단어 따위가 적힌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독서실 책상 한 칸을 차지하고 앉아, 졸음을 쫓으려 노란색 커피믹스를 타 마셨다. 인생에 공부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것만 같던 시절.

 모처럼 교복을 벗고, 어색한 화장을 하고 시내로 놀러 나가는 날이면, 커피전문점에서 ‘카라멜 마끼아또’를 주문할 줄 아는 세련된 여자애가 되어야 했다. 어른 흉내가 마냥 재미있던 그 무렵, 돌이켜보면 인생은 꼭 휘핑크림을 잔뜩 얹은 카라멜 마끼아또만큼 달달했다. 

 스무 살이 되고는 꼭 시럽을 넣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커피 맛을 아는 어른은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커피 맛을 안다는 것은 무얼까. 미지근하게 식은 싸구려 커피에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는 가사를 이해한다. 우습고도 서글픈 노래를 따라 읊조리며 아직 어색하기만 한 ‘어른’이란 이름을 실감한다.

 ‘사글세 내고 돈 없을 때 밥 대신에 마시는 아메리카노’가 어떤 맛인지도 안다. 10cm가 왜 “시럽 시럽 시럽, 빼고 주세요.”를 외쳤는지도. 그 아메리카노는 딱, 청춘이라는 시절의 무게만큼 진하고 써야만 했다.

중후한 멋을 즐길 줄 아는 나이가 되면 꼭 에스프레소 머신을 집에 들이고 싶었다. 매일 아침을 진한 에스프레소와 함께 맞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어른의 모습이길 바랬다. 고가의 머신을 살 수 있는 경제력이 생긴 만큼, 내 책임감도 무거워질까. 에스프레소만큼이나 진하고 쓴 인생의 맛이 머신을 타고 함께 내려올까. 그 막중한 것들은 과연 그 조그만 에스프레소 잔에 다 담기기나 할까.

모퉁이를 돌면 커피전문점이 있었다. 9개의 스탬프가 찍힐 동안 안면을 튼 주인이 언젠가부터 “오셨네요.” 라는 인사를 건네는 곳이었다. ‘시럽 넣을까요.’ ‘시나몬 가루 뿌려 드릴까요.’ 친절하게 물어오던 주인은 이제 묻지 않고도 내 취향의 커피를 만들어 줄 터였다.

 발길을 돌려 편의점으로 갔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싼 커피가 당겼다. 진한 T.O.P를 지나쳐, ‘그냥 커피’를 하나 집었다. 충분히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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