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더 편리한 교통과 잘 정비된 탐방로를 통해 지리산을 더 가까이, 더 편히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쉽게 지리산을 오르다 보니 뭔가 중요한 것을 간과 혹은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이든다.
광각렌즈의 단점처럼 지리산의 속살, 진면목에 대해잘 모르는 왜곡된 시선이랄까. 지난 주, 상쾌한 아침 내음을 맡으며 천왕봉을 올랐다. 바람이 다소 쌀쌀하긴 했지만 완연한 봄날씨였다. 그러나 천왕봉이 나를 맞이한 것은 상고대 즉 서리나무와 눈꽃들이었다. 지난밤 비가 오고 기온이 떨어져 공기 중의 물기가 나무에 달라붙어 얼어붙은 것이다.
앙칼진 바람은 카메라를 꺼내는 손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저 발아래의 세상은 푸릇한 봄날인데,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겨울의 한 가운데로 돌아온 것이다. 그 일주일전에도 이 곳 천왕봉에 왔었다. 그 때는 함양의 백무동 쪽이었는데, 하동의 쌍계사 십리벚꽃길을 걸은 지 꼭 열흘이 지나 지리산 반대편에서 다시 피어나는 벚꽃을 보면서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지리산을 ‘밟고 오른다’고 말하지만, 지리산에게 있어 우리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바람 혹은 미진에 불과할 뿐이다. 그만큼 지리산은 인간의 영역과는 별개의 절대적 존재인 것이다.
상대방에 걸맞는 마음자세과 몸가짐을 갖춰야함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지리산에게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 말로는 민족의 영산이다, 어머니산이다, 국립공원 1호다, 라며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지만, 사람의 진심은 말이 아닌 선택과 행동으로 보여진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술에 취해 고성방가하고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며 담배를 피우면서 길이 아닌 길을 밟아서 지리산을 더럽히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리산에 온 걸까. 이런 사람들을 볼 때면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지리산에게 뿐만 아니라, 예의를 지킬 줄 아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미안해서이다.
부동심과 인내의 표상, 과거 이데올로기에 상처 입은 자들의 피신처였고, 현대인들이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는 곳, 또한 휴식이 되는 곳. 여기는 다름 아닌 지리산이다.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오시라. 이것이 내가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거듭 당부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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