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의 그림
고갱의 그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8.1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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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진/수필문우회 회장

 
1988년 5월 미국 워싱턴에 출장을 갔더니 마침 그곳 ‘국립미술관’에서 고갱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그가 사망한 뒤 최대규모라는 그 전시회에서는 여러 책을 통해 알게 된 그의 그림들을 거의 다 만날 수 있어서 무척 행복했다.

고갱은 흔히 세잔, 고흐와 함께 후기인상파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인상파 그림을 그린 것은 주식중매사업체에 종사하며 일요화가로 활동을 할 때였다. 그는 1888년부터 브르타뉴 지방 퐁타방(Pont-Aven)에 체재하면서 회화에 있어서 하나의 중대한 발견을 한다. 르네상스 이래로 회화에 사용해 온 3차원적인 표현이나, 사실주의 이후의 시각제일주의에서 벗어나, 자연을 앞에 두고 그것으로부터 하나의 ‘추상’을 끌어내서 새로운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그림은 종합주의(synthétisme) 회화의 출발이고, 동시에 상징주의 미술의 단초도 된다. 고갱의 ‘설교 후의 환상’이란 작품이 이에 해당된다. 1889년에는 에펠탑 건립으로 유명한 파리국제박람회를 맞아, 고갱은 첫 ‘종합주의 회화전’ 개최를 주도했다.

이 시기의 고갱 작품으로는 ‘황색 그리스도’가 있다. 이 그림은 종합주의의 한 측면이기도 한 ‘클루와조니즘(Cloisonnisme)’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 작품이다. 고갱은 이 그림을 검은 윤곽선으로 구분한 단색부분들로 구성했으며, 고전적인 원근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고갱은 기존 유파에 안주하지 않는 급진적인 개혁자였다. 그는 유럽의 문명에 대한 증오와 원시적 야만에 대한 동경에 이끌려 1891년 타히티로 가서 2년간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망령이 보고 있다’와 ‘타 마테테 : 시장’등이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반인상파적인 것으로 평면적인 밝은 색을 많이 사용하고, 낭만주의의 핵심인 상상력을 회복하기 위해 원시적이고 소박한 지방색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말라르메처럼 고갱의 타히티 그림에 찬탄을 보내며 높이 평가한 사람도 있었지만, 파리에서 그의 작품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다. 고갱은 1895년 다시 타히티로 간다. 순교를 하지 않는 한 활동을 중단할 수 없는 예언자처럼, 스스로의 예술적 사명에 충실한 고집스럽고 긍지 높은 예술가의 모습이었다. 1897년부터 고갱은 심한 고독과 병고에 시달린다. 병은 ‘달과 6펜스’와는 달리 한센병이 아닌 매독이었다.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그가 가장 사랑한 딸 알린이 죽었다는 소식이 도착하고, 헤어진 아내의 편지도 그 일이 있자 영영 단절된다.

그는 유언 대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그려놓고 자살하기로 결심했으나,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는 자살에 실패하고 건강만 더 해치고 만다. 그 뒤에 고갱은 6년을 더 산다. 1901년 그는 타히티를 떠나 더 떨어진 마르케사스 군도의 한 섬으로 옮겨가서 2년 뒤에 사망했다. 그가 죽고 나자 아이러니컬하게 그의 그림이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고흐나 세잔의 경우와 같다.

지난 6월 중순부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그리고 그 이후’의 전시가 시작되어 오는 9월 말까지 계속된다. 전시작품 점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정도로 고갱 작품의 정수들이 모였다. 언제 우리가 이만큼 경제적인 힘이 생기고 문화적으로 존중을 받는 국민이 되었는지 감격스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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