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 안희제
백산 안희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8.15 11: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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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곤/밀양동명고 교사·경남국학원 이사

 
백산 안희제는(白山 安熙濟1885-1943)는 1885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출생해 부산 최초의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일반적인 회사는 이익을 추구하여 부를 축척이 목적이었지만 백산의 의식은 달랐다. 교육자이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항일 독립투사였다.

고향 의령에 의신학교, 창남학교를 설립하고 윤상은이 설립한 구포의 구명학교에서 2년간 교편을 잡았다. 1911년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에 정착하여 최병찬과 독립순보를 간행했으며, 1913년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1917년 구포의 윤현태와 자본금 100만원으로 백산무역주식 회사로 개창하였다. 백산은 국내지주들이 기부, 기탁한 자금의 어음을 경남은행 본점에서 할인하여 상해로 송금하는 책임을 도맡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백산상회는 표면상으로는 순전히 상업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리기관인 것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해외독립운동의 국내 연락과 그 자금공급을 목적으로 설립된 민족운동의 국내후원기관이었다. 1927년 경영난과 일제의 탄압 및 방해로 해산될 때까지 독립운동의 자금조달과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락 등 국내에서 지원하는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또 백산상회를 중심으로 1919년 11월경 부산에 거주한 한국자본가들이 기미육영회를 조직하고 한국청년들 중 수재를 선발하여 일본 기타 외국에 유학시키기도 했다. 1931년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많은 활동을 하던 중 1942년 10월 일제가 대종교 본부를 습격하여 윤세복 등 간부 20여명을 검거한 대종교사건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1943년 7월 31일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으나 8월 3일 59세를 일기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으며, 부산시에서는 그의 독립정신을 그리기 위해 원래 백산상회가 있던 곳에 기념관을 만들어 선생의 유품과 관련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백범과 백산과 최준 부자-백산과 경주 부자 최준은 같은 영남 부호로서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사이로 12대 만석꾼 집안으로 거액의 독립군 자금을 비밀리에 전달한 혼이 살아 있는 부자로 유명했다.

해방 이후 경교장에 돌아 온 백범 김구 선생이 가장 먼저 보고 싶어 한 사람이 최준이었다. 두루마기를 입은 최준이 경교장에 들어서자 백범은 “오랫동안 자금을 보내주어 고마웠습니다”라며 맞았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전달된 독립자금 비망록을 최준이 펼쳐 보였다. 김구는 국내외에서 받은 장부를 같이 꺼내 놓았다. 비망록을 보면서 두 사람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고 말았다. 최준의 자금이 백산을 통해 여러 차례 임시정부로 전달되었는데 한 푼도 틀림없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는 것이었다. 혹시 내가 보낸 일부가 여행비나 여비로 사용해서 반이라도 전달되었으면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틀림없이 전달되었음에  통곡했다고 한다.

백산 나를 용서해 주시오! 당신을 의심했던 나를 하늘나라에서 용서해 주시오! 라며 백범과 뜨거운 포옹을 한참 했다고 한다. 한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요즘 아이들의 손을 잡고 노블리스 오블리제(사회지도층, 상류층의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실천한 백산 생가를 찾아 어떻게 사는 삶이 올바른 삶인지, 같이 느껴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올해 밀양여고를 졸업한 한 여학생은 역사기행을 통하여 위안부 할머니의 가슴 아픈 삶의 역사를 알게 되었는데, 할머니들의 가슴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리기 위해 법대를 진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번 사는 인생 나와 민족과 인류를 위한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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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성 2013-09-27 19:10:43
백범 선생님 ...영원하신 민족의 지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