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과 고통의 시대 앞에
재앙과 고통의 시대 앞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8.07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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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민들레 공동체 대표
지난 7월 우리에게 잊지 못할 충격을 준 두 사건이 있었다. 집중폭우로 인한 서울 우면산 산사태와 노르웨이 한 극우 광신자 테러에 의한 우퇴아 섬에서 벌어진 참사이다.
우면산 사태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면 서울시가 디자인 수도라는 외관치장에 쓴 재정에는 돈을 쏟아 부었지만 정작 시민의 생존에 직결된 방제 재정에는 무관심했다는 지적이다. 또 난개발로 인한 재난예상과 그럼에도 안일했던 행정 조처 등 후진성을 면키 어려운 재난이 되어서 더욱 국민의 슬픔을 증폭시킨 사건이었다. 반면 노르웨이 참사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그야말로 경악과 충격이었다. 국왕과 총리가 경호원 없이도 다닐 수 있었던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에서 반인종적, 반문화적 적개심을 가진 한 사람에 의해 죄책감 없이 저질러진 사건이다.
이제 지구촌에 살아가는 대다수의 인류는 세계적 혹은 지역적 재난과 개인적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삶의 부분이라는 불안감을 매일 안고 살아가는 세대가 된 것 같다. 정치 제도와 정책의 불성실, 만연되어가는 테러와 폭력의 위기, 지속 불가능한 발전에의 욕망과 에너지 위기 이로 인한 기후 변화 그리고 뒤 따르는 각종 자연 재해의 절망스러운 소식은 매일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런 지구적 재난과 개인의 고난이 일상화 되가는 우리시대의 정작 준비해야 할 본질적인 질문이 무엇일까.
수많은 사람들은 지구적 의제 앞에 서면 의당 정치 경제적 책임 추궁과 이와 더불어 생태 환경을 지키려는 지구시민의 힘겨운 투쟁 등이 논의된다. 그리고 아나바다(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와 착한 소비운동 등과 같은 삶의 양식을 전환하자는 노력이 확산되는 건 역시 귀한 일이다.
필자가 생활하는 학교 옆에는 냇가가 흐르고 있다. 평소에는 발목에 물을 담그고 소일해도 좋은 곳이지만은 비만 오면 계곡물이 넘쳐 능히 건널 수 없는 위협이 된다. 금번 여름 깨달은 사실은 사람도 떠내려가고 큰 돌도 굴려가는 냇가에서 힘없어 보이는 피라미와 고동 등은 비가 그치면 또 언제 그렇다는 듯이 여전하다. 아니 그 미물들이 어떻게 그 재앙 같은 폭우 속에 그들의 생명을 유지 시킬 수 있었단 말인가. 바다까지 떠내려갔다가 다시 헤엄쳐 올라올리 만무한데 말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본능적으로 재앙과 재난에 적응하는 능력을 지켜왔다. 수천수만년이 지났음에도 그들 고유종의 생명과 특징을 소실시키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재앙과 재난에 취약한 생활양식을 키워왔고 그 본성 또한 자연과 우주에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놀다가 다치면 별도의 약을 구해먹거나 병원에 갈 일이 없었다. 있다 보면 겨드랑이와 사타구니가 붓기 시작하다가 조금 앓다 보면 저절로 나았다. 몸의 자가 면역 체계가 외부 병균을 이기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아이들에게 이런 신체 현상이 전무하다. 조금만 아파도 약을 먹고 병원에 가니 몸이 스스로 돌볼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소위 후천성 면혁결핍증이 일상화 된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인간의 몸의 행복에 크게 기여했고 삶의 질을 높여갔지만 이러한 낙관론적 세계관과 물질중심의 생활양식은 인간존재를 재난과 고통에  취약하도록 만들어 왔고 인류가 무통문명(無痛文明)을 꿈꾸면 꿈꿀수록 작은 변화에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존재가 되어왔다. 고통은 사람을 변모시킨다. 고난과 재앙의 불가피성은 인류를 정화시키든지 인류를 전락시킬 것이다.
더 큰 행복 더 나은 삶의 추구보다 불행과 재앙을 견디는 본성과 습관을 길러내고 개인의 고난과 고통을 나누고 공감하는 세상살이를 더 많이 준비해야 될 때가 되었다. 재난과 고난이 주는 의미를 사회화 하는 노력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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