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선언과 우리의 광복
카이로 선언과 우리의 광복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8.28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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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진/수필문우회 회장·

1945년 8월15일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연합국 측이 '카이로 선언'에서 제시한 모든 조항을 수용하고 ‘무조건 항복’을 한 날이다.


‘카이로 선언’은 연합국 측의 미국∙영국∙중국 3개국 수뇌가 1943년 11월22일 카이로에서 만나 5일간의 회담을 한 후, 같은 달 27일에 발표한 대일 통고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3개국의 전쟁 목적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는데 있으며, 영토확장의 의도는 없다.
2.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탈취∙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섬을 박탈한다.
3. 일본이 점령한 만주∙대만∙펑후제도(澎湖諸島)를 중국에 반환하도록 한다.
4. 일본이 탈취한 다른 모든 지역으로부터 일본을 구축한다.
5. 조선은 적정한 과정을 거쳐 독립을 하도록 한다.
6. 이상의 목적을 위해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할 때까지 전투를 계속한다.

이 선언에서 주목되는 것은 일본에서 조선을 조건 없이 즉각 독립시킨다는 구절이 들어가지 않고 "적정한 과정을 거쳐서(in due course)"라는 단서가 들어간 점이다. 우리 민족이 아직도 겪고 있는 커다란 시련이 이 단서에서 비롯됐다. 제2차 대전 전에 나라를 빼앗기거나 병합을 당한 나라 가운데 이러한 조건이 붙어서 해방된 나라는 오스트리아와 우리나라 단 두 나라뿐이었다.

오스트리아는 히틀러 나치정권에 의하여 1938년 독일에 병합되었다. 그 조치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1개월 뒤 실시되자 나치의 공식발표로는 독일 사람은 99%, 오스트리아 사람은 99.75%가 찬표를 던졌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연방의 여러 나라는 오토1세에 의하여 신성로마제국이 성립된 962년부터 프란츠2세의 퇴위로 제국이 해체된 1806년까지 844년 동안 같은 제국에 속해있던 형제나라였다. 원래 이러한 나라끼리의 즉각 분리독립은 연합국 측에서 볼 때 좀 무의미한 처방일 수도 있었다. 얼마나 많은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나치에게 저항을 하는가를 좀 더 지켜보고 결정할 일이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 그들에게 독일 국민에 준하는 전쟁책임을 물어야 될 경우도 상정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고대 삼한, 삼국시대로부터 2000년 가까이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져온 자주독립국이었지만, 근대에 와서 개화에 늦장을 부리다가 낙후되어 1910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에 치욕스러운 강점을 당했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세계평화를 위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다.
소련 같은 나라에서는 연해주의 우리동포들을 일본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는 집단으로 간주하고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시킬 정도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는 애매하게 비쳐졌다.
세계대전이 끝나자 연합국이 오스트리아에 요구한 것은 10년간,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5년간의 신탁통치였다.

오스트리아는 미∙소∙영∙불 4개국의 신탁통치를 10년간 다 수용하고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했지만, 우리는 반탁을 관철하고 3년 만에 남북이 따로따로 정부를 수립했다. 다시 2년 뒤에는 남북 간에 전쟁이 발발해서 3년 만에 휴전이 되고, 그 후 일촉즉발의 긴장된 휴전 상태가 60년간 지속되고 있다.

대한제국이 북으로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한 조선 팔도를 판도로 했으니, 우리의 진정한 광복은 남북이 하나의 강토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아직까지 남들이 만들어 놓은 대치구도 속에 그대로 갇혀 지구 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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