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가 중국 사람으로
윤동주가 중국 사람으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8.29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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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곤/밀양동명고 교사·경남국학원 이사

그렇게 무덥던 여름도 이제 자연의 섭리를 따라 조석으로 시원해지고 있으니 자연의 조화가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 깨닫는다.

방학을 맞아 학생들과 동북3성(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을 역사기행 하고 왔다. 동북으로 갈 때 특히 다음 3가지에 유념하여 가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 100년 전 독립의 현장
19세기 말부터 이주가 시작되어 일제 강점기 때에는 잃어버린 강토를 찾고자 목숨 걸고 독립을 쟁취했던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지금은 자동차, 기차 창 너머 옥수수 밭을 보면서 한가하게 기행을 하지만, 독립투사들은 일제의 검문검색을 피해 가면서 오늘이 마지막 이라는 마음으로 임했다 오죽하면 독립군이 되려면 얼을 죽을 각오! 맞아 죽을 각오! 굶어 죽을 각오가 서 있지 않으면 감히 독립군이 될 수 없었다고 한다. 1910년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상실되자. 우리가 잘 아는 이항복의 후손 이회영 6형제는 그 많은 토지와 집을 급매하여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600억이란 엄청난 돈을 짊어지고 압록강을 건너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인재를 양성하였다. 노블레스 오불리주(사회지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혼이 살아 숨 쉬는 집안이었다. 자신이 누리는 명예 노블레스만큼의 의무 오불리주를 다하여야 그 사회가 안정되고 평안함은 지금 우리 시대에 가슴에 새겨야 할 근본적인 덕목이다.
당시 동북지방에는 홍범도, 최진동, 안무 중심 이었던 대한독립군, 김좌진, 이범석, 서일이 이끌었던 북로군정서, 이상룡, 지청천, 김동삼이 이끌었던 서로 군정서, 대한독립단, 대한독립 청년단, 광복군, 흑색공포단 그 외 일제가 가장 무서워했던 약산이 중심이 되었던 의열단. 이름 없이 독립을 위해 선열들이 피를 흘렸던 독립의 현장임을 알자.
● 우리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왜곡
2002년부터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국가 차원에서 시작했다. 그 요점은 중국내에서 일어났던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전제 하에 서북공정,서남공정,하상주단대공정 중화문명탐원공정을 해서 이제는 거의 완성된 단계이다. 2002년 월드컵 때 4강 신화를 실화를 이루어낸 정신적인 지주 붉은악마(배달국14치우천황)를 중국의 시조로 귀근원에 모시고 있다. 원래 중국 사람들은 태산 황산 등을 좋아 했는데 이제 백두산에 올라보면 중국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한민족의 백회(百會)인 백두산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사진도 찍을 수도 없다. 용정시 명동 촌에 갔더니 입구에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글씨가 담에 쓰놓고 노골적으로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 고구려, 고조선 우리의 고토
집안에는 고구려의 2번째 수도였던 국내성이 있다. 지금도 중국 사람들이 쌓은 성과는 다른 형태의 성을 볼 수 있다. 그 유명한 국강상광개토경편안호태왕릉(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과 비(碑) 그리고 그 아들 장수왕의 무덤과 고분이 너무나 웅장하게 한민족의 기상과 철학을 대변하고 있다. 고구려의 연호는 다물(多勿)이다. 다물 은 바로 그 위의 고조선의 역사와 문화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뜻으로 경상도 사투리에 다 물려내라, 가 증명하고 있다. 2096년을 47대 단군이 재임했던 고조선의 38대 단군이 바로 다물 단군이었음을 가슴에 새기고 역사기행을 할 때 가슴에 뿌듯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광개토태왕의 뜻은 나라를 강하게 한 후 영토를 넓히고 편안함을 추구했던 왕이다. 티베트, 몽골, 서장은 언어도 문자도 중국과는 다른 나라이다. 즉 언젠가는 독립을 하게 된다. 역사와 정신뿌리를 잊지 말아야 고토를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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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성 2013-09-27 19:04:39
올바른 역사교육...언제쯤 이루어질지...휴......